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저녁연기 /박희선

저녁연기 박희선 찐 고구마 두 개 두유 한 통으로 복사꽃 그늘에서 새참을 먹었다 내 뱃속에서 밥 달라고 보채는 청개구리 울음을 간신히 잠재웠다 온종일 쇠스랑으로 감자밭만 장만하고 빈 지게만 지고 돌아오는데 누가 내 허리에 천 근 납덩이를 매달았나 두 무릎에서는 자갈자갈 자갈밭 밟는 소리가 너무나 아팠다 산 그림자 속에 외딴집 굴뚝에 저녁연기가 꿈처럼 올라간다 지난겨울 큰 수술을 받은 아내가 일어난 것일까 아침에 차려주고 온 흰죽을 다 비웠을까 잠자던 아궁이에 누가 불을 지피는가 누군가 부엌문을 반쯤 열고 나와 한 번만 웃어주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나 봄 하늘 초승달이 내 마음 먼저 알고 까르르 웃는다 ―『문학과창작』)2022-겨울호)

겨울 숲에서 /안도현

겨울 숲에서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꽃적금 통장 /박재숙

꽃적금 통장 박재숙 장구채 노랑등심붓꽃 동강할미 노루귀 금꿩의다리 골든벨 처녀치마 바람꽃 복수초 장미수국 아나벨수국 앵초 산자고 뻐꾹나리 무스카리 물매화 찔레장미 넝쿨장미 들장미 화이트캔디 초화화 칸나 물양귀비 능소화 안개꽃 타래난초 운남앵초 섬말라리 숫잔대 수련 눈꽃 땅나리 아기쥐손이 청화쥐손이 노랑무늬붓꽃 가지피기매발톱 플록스나타샤 으아리매발톱 리아트리스 큰꽃으아리 연잎양귀비 유럽금매화 금화규 물망초 캄파눌라 흰금낭화 레위시아 운간초 풍로초 올해 만기 된 가을 정원 내년 봄엔 이자로 무슨 꽃적금을 들어야 할까 ―시사진집『천 년쯤 견디어 비로소 눈부신 』 (詩와에세이, 2022)

깜깜한 손 /안윤하

깜깜한 손 안윤하 막장의 어둠에 집어넣었으나 끝내 빼내지 못한 손이 석탄박물관에 걸려있다 누런 월급봉투를 외투 속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모두 끼워 닫는다. 이번 달에는 꼭 봉투째 마누라 손에 넘겨주리라. 고등어 한 손, 풀빵 한 봉지, 큰 애 검정 고무신 사 들고 기세등등하게 귀가해야지 시장은 어둑하고 배는 고프고 목은 컬컬하고 선술집 전구가 불그레 작부의 볼이 불그레 밤새 어깨 우쭐대던 검은 손이 불그레 텅 빈 새벽 별이 불그레 또다시 깜깜한 손! 호미로 나물죽 캐는 닳은 손, 밀린 학사금에 동동 구르는 텅 빈 손, 또다시 나락의 밑바닥을 긁어야 하는 막장의 저 손*! * 검은 손 : 문경의 석탄박물관에 걸려있는 손 사진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늙은 여우 /김금용

늙은 여우 김금용 벽에 붙은 햇살 몇 올 목에 감고 새벽부터 가쁜 숨 토해내는 매미의 비명 방충망에 달라붙은 채 배 한복판에 붙은 입술을 떨며 날 향해 울부짖네 창 좀 열어봐 떠날 날이 며칠 안남았어 전철 소음 속에서 받은 전화 탓이었을까 짜증내며 뱉어 버린 대꾸, 사랑보다는 이별이 쉬워 그래, 나는 겁쟁이야 무모한 나이가 아니거든 모난 생의 외곽에서 외치는 악다구니 내 영역이 아니라고 돌아서서 바로 직진하지만 몰라 자꾸 뒤통수가 뜨거워 미안해 그렇게 또 나는 못 본 척 도망치고 마네 아무래도 늙은 여우가 됐나봐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막장에는 눈물이 있다 /이화은

막장에는 눈물이 있다 이화은 오전에 시집을 읽고 오후에 드라마 재방송을 본다 막장이다 시집인가 드라마인가 한 끗 차이다 한 끗 차이로 버스는 떠났고 권력은 이동하고 한 끗 차이로 너는 죽고 나는 살고 오전에 드라마를 보고 오후에 시집을 읽을까 한 끗 차이를 두고 갈등한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인생이란 말에 울컥 눈물이 난다 눈물이 흔해지니 내 인생도 막장에 다 왔나 보다 베고니아가 겨울 꽃을 견디고 있다 꽃을 눈물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건달처럼 건들건들 또 하루가 왔다 간다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밥 한 끼 /김명인

밥 한 끼 김명인 밥 한 끼 같이 하자는 너의 말에 그래야지 그래야지 얼른 대답했지만 못 먹어 허기진 세월 아니니 어떤 식탁에는 수저보다 먼저 절여진 마음이 차려지리라 애꿎은 입맛까지 밥상에 오른다면 한 끼 밥은 한 술 뜨기도 전에 목부터 메이는 것, 건성으로 새겼던 약속이 숟가락 한가득 눈물 퍼 담을 것 같아 괜한 걱정으로 가슴이 더부룩해진다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중고 /이정록

중고 이정록 관과 수의는 중고 파는 데 읎나? 사람이 중곤디 새것이 뭔 필요겄어? 바닷물두 다 물고기 창자를 들락거린 중고잖여. 헌 게 불길이 괄겄지만 자식들 맘이라두 편허게 입혀주는 대로 입구 덮어주는 대로 덮구 떠나유. 공기두 다 짐승 콧구멍을 들락거린 중고구 꿀두 몽땅 꿀벌이 먹었다가 뱉은 중고잖여. 관짝은 사과 궤짝 뚝딱뚝딱 잇어 붙이구 수의는 베잠뱅이 풀물 들여서 입으먼 안 되까? 죽음이란 게 처음 맞는 새 손님인디 오찌 헌 옷 입구 저승 첫날밤을 맞는데 유? 중고 타령 그만 허시구 병치레난 잘허셔유. 요새 중고는 다 학원이나 피시방에 있유. 늙은이 숨넘어가는 절박헌 소리에 왜 죄읎이 사역허는 학생을 갖다 붙인댜? 불쌍허구 이쁜 중고생덜을. 잘못했유. 버럭 역정 내시는 걸 보니께 중고가 아니라,..

우물이 있던 자리 /심동석

우물이 있던 자리 심동석 우물을 찾는 고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강변길에 숨었다고 우물은 치렁머리 고모님이 샘물을 긷던 곳이라 했다 어느 날은 우물에 빠진 만삭의 달, 어느 날은 푸르른 별빛 꿈을 두레박에 가득 담아 올리던 곳이라 했다 고모님이 고개를 크게 젖히며 다시 웃었다 사철 짙푸르던 우물을 찾았다는 듯 두 손으로 두레박을 허공으로 자꾸 당겨 올렸다 병실을 나서면서, 끝내 말하지 못했다 우물 위로 버스가 지난다고… ―『시와소금』(2022, 겨울호)

그늘 /심동석

그늘 심동석 돌담 그늘에 마른 잡초들이 냉이꽃을 품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깨를 흔들어 냉이 꽃에게 가만히 하늘을 보여준다 사람에게도 그늘이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 그늘진 손이 그늘진 손을 따듯이 잡아주는 것은 아픔이 아픔을 품어주겠다는 말 잘 마른 씨앗도 그늘이 없으면 싹 틔우지 못한다는 말 초겨울 햇살이 꼬리 감추는 마당 마른 잡초들이 냉이 꽃송이를 몰래 품고 있다 그늘진 가슴이 그늘진 가슴을 가만히 품어주고 있다 ―『시와소금』(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