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눈사람 /임양호

눈사람 임양호 밤사이 누가 왔나 봐요 문밖이 수북하네요 하지 못해 빛났던 말들이 저렇게나 많은 양 어둠에 기댄 순결의 높이가 참 놀랍네요 그 기다랗던 밤에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은 소리 없이 오는 그대 발자국에 귀 기울이다 동짓날 새알심같이 마음만 웅크려 하얗게 동그래졌잖아요 이 계절이면 하나씩 눈 속에서 애인들이 움트는데요 이행치 못한 하얀 약속의 페이지 같아요 모든 언약들을 펼쳐놓고 얘기 좀 해봐요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만 비추어 보며 안아주면 녹아 사라질까 마음에만 머물기로 해요 그럼 전설은 처마 밑 거꾸로 커가는 고드름의 그리움만 같아서 언젠가 제 무게로 떨어져 심장을 쑤시고 들어올 거예요 그땐 아리고 아파 녹아 없어졌다 말하진 못할 거예요 생의 흐린 날에 만나 맑은 날에 사라지는 눈사람 애인 ―『시..

저녁의 태도 /임경묵

저녁의 태도 임경묵 섬섬한 애인 무릎에 저녁이 앉아 있다 한번 만져 봐도 돼? 눈 감고 가만히 저녁을 만져 본다 새벽이 올 때까지 애인 무릎에 앉아 있겠다는 저녁의 태도는 언제나 옳다 어둠은 수위를 높이고 골목으로, 골목으로 흘러가고 숲으로 돌아가던 새들은 투명한 방음벽에 부딪혀 저녁의 이마를 핏빛으로 물들이네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무릎부터 만지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 거니? 바람이 분다 이팝나무 가로수가 탬버린처럼 흔들린다 골목마다 사용할 하루치 어둠을 나눠 주고 피곤한 듯 애인의 무릎에 저녁이 앉아 있다. ―시집『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시인의일요일,2022)

하찮은 물음 /윤성관

하찮은 물음 윤성관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어느 대학 가고 싶니, 죽을 둥 살 둥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고등학교를 묻고, 회사에서는 대학교와 학과를 묻고, 결혼 후에는 어디에 있는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묻고, 늙은 요즘에는 자식들이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하찮은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만큼 하찮게 살아왔지만 물어보려면, 저 별빛은 언제 태어났는지,「전태일 평전」을 읽고 뒤척이다 아침을 맞은 적 있는지, 귀를 자른 한 화가의 자화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詩)가 얼마나 많은지, 당황하더라도 이 정도는 물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물어줘야지 아침마다 새들이 묻는 소리에 내 마음에 꽃 한 송이 피우는데 ..

고독사 /전윤호

고독사 전윤호 우편물은 거부합니다 초인종 눌러 봤자 철문에는 사천왕이 눈을 부라립니다 요즘 폐관이 유행이라지요 모두들 동안거 중입니다 한 소식 얻은 자들이 늘어나겠네요 이 나라는 수행자들의 천국 곳곳에 토굴 파고 암자 짓습니다 지금 혀를 차는 당신도 결국은 홀로 용맹정진하다 끝나지요 부디 윤회의 굴레에 들지 않기를 오늘도 이 도시의 한구석에서 토굴 하나 발굴되었답니다 경배합시다 당신이 마스크 쓴 부처입니다 ―시집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걷는사람, 2022)

어머니와 아들 /이승호

어머니와 아들 이승호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셨다 생떼를 부리고 간 아들을 위해 도시락을 들고 십 리 먼길을 걸어오셨다 밭일을 하다 오셨는지 머리수건을 쓴 어머니는 더없이 촌스러워보였다 “여긴 왜 와, 창피하게” 어머니는 말없이 도시락을 쥐여 주고 발길을 돌려 가셨다 열다섯 살, 철봉대가 뜨끈한 날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나는 그날의 잘못을 빌지 못했다 아들의 마음이 이제 이렇게 아픈데 어머니는 얼마나 서글피 울며 가셨을까 어머니는 가끔 내 꿈속으로 찾아오신다 어머니, 저는 시를 쓰고 있어요 그래그래, 어머니는 연신 맞장구만 하신다 매번 꿈속에서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다 ―시집 『국경 근처에서 집을 말하다』(들꽃, 2022)

국경 근처에서, 집을 말하다 /이승호

국경 근처에서, 집을 말하다 이승호 1 꿈의 그 집에서는 내가 영원히 살지 못하네 나는 집에서 살 수 없으니까 수많은 집을 전전했으니까 저 새끼가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유곽은 후미진 곳에 있고 성당은 높은 곳에 있어야 하네 그래야 장사가 되지 나는 쫓겨나 마땅하고 마루에서 몰래 쓰러져 자는 외삼촌과 같은 부류였으니까 집은 필요없어됴 모든 이에게 집이 있다면 모든 이에게 집이 없다면, 비극은 사라질까 예수회 신부는 소가 되어 쟁기를 걸고 헐떡이면서 밭을 간다 그는 동굴로 돌아와 쓰러진다, 쓰러진다 내가 그 아이의 눈빛과 마주쳤으니 나는 천국에서 도망친 자와 다름이 없구나 그는 흐느껴 울고 울다가 돌을 움켜쥔 채 피투성이로 싸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를 존엄성이라 불렀다 집을 위하여 모든 요설가를 제압하는 집의..

과분(過分) /이상국

과분(過分) 이상국 알지도 못하는데 커피콩을 외상으로 주는 동네 가게 어떻게 시 한 편 있는 줄 알고 용케 도착한 청탁서 괜히 마음이 언짢은 날 내리는 비 연립주택 화단의 애 머리통만 한 수국 점심은 먹고 왔는지 남해에서 하루 만에 달려온 택배 어디선가 사람을 낳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 깊이 감춰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무리 두꺼운 어둠을 만나더라도 어떡해서든지 오고야 마는 아침아 부모가 있다는 것 나무들이 있다는 것 통장에 찍힌 손톱만 한 원고료 해지면 기다리는 식구들 ㅡ시집 『애지愛知』(2022, 겨울호)

포커 치는 개들 /김상미

포커 치는 개들 김상미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십오 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 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 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 간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