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귀 /김성춘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귀 김성춘 한국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피아노 조율사 K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평생을 피아노 조율을 해오면서 훌륭한 연주가들을 많이 만났을 텐데, 그중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조율사 K가 말했습니다 아, 생각나요,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도 아니고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도 아니고 지휘자 정명훈 선생도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을 내가 초 집중해서 조율을 마쳤을 때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그 집 피아노의 꼬마 주인공 여섯 살짜리 유치원생 말을 잊지 못해요 잘 조율된 피아노 건반 하나를 손가락으로 띵! 쳐 보더니 "똑같네"라고 꼬마는 말했어요 아,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그 말 한마디 "똑같네" 나는 어린 귀 앞에 할 말을 잃었지요 ㅡ『시에』(2022, 겨울호)

두물머리 연꽃 /김학명

두물머리 연꽃 김학명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어둠의 밑바닥 진흙탕에서 삭히고 삭혀진 믿음길 하나 무량한 세월의 기다림에 세한의 물방울 타고 오는, 너 푸르른 격자무늬의 옛 약속 잊지 않고 손잡아 오면 밝디 밝은 그 붉은 연민의 사랑으로 피어오르는 아련한 내 마음속 한 송이 두물머리 연꽃 ―『시와소금』(2022, 겨울호)

툭, 떨어졌다 /나정숙

툭, 떨어졌다 나정숙 장례식장 앞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여기저기에 담배꽁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가 다니던 레미콘 회사가 위치한 작은 도시, 뱅글거리는 삶을 매달고 달리는 차량들을 애써 외면했다 장례식장 금속문 손잡이는 왜 이리 차가운지 말쑥한 양복 차림을 한 그가 경쾌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는다 각자 슬픔의 무게만큼 부의금 봉투를 채웠다 그를 닮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다 아이스크림이 되어 금방이라도 녹아 흘러버릴 듯한 여자의 팔에 매달린 채 향로 안에 재가 툭, 떨어졌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려오는 발가락은 아픈 줄을 몰랐다 슬픔이란 언제나 발끝에서부터 시작되는가 보다 여전히 환하게 웃는 그가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마음이 먼저 바닥에 떨어진다 — 『열린시학』(2022, 가을호)

처음인 양 / 심언주

처음인 양 심언주 풀밭에서 양들은 뭉치면 한 마리, 흩어지면 백 마리. 몰려다니는 양들 따라 바뀌는 풀밭의 지도. 양은 처음 보아요, 딸은 토끼띠, 벨기에로 향하는 기차 밖으로 소도 말도 양도 보이는데, 소나 말은 알겠는데, 양은 처음 본다고 딸이 말합니다. 양털 이불도 덮어주고, 양떼구름도 보여줬는데 딸은 토끼띠, 나는 호랑이띠, 양을 그려보긴 했는데, 양을 세어보긴 했는데…… 엄마, 양은 처음 보아요. 처음이라 말하는 순간 처음은 사라집니다. 양이라 말하는 순간 양은 사라집니다.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양이 풀을 뜯습니다. 양양에도 대관령에도 딸을 데리고 갔는데, 양떼 목장에 가긴 갔는데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눈썰매만 탔습니다. 갈대를 뭉쳐놓은 듯 몰려다니는 양은 안 보여주고, 새하얀 양만 그리게 했습..

스리슬쩍, 사과 /김찬옥

스리슬쩍, 사과 김찬옥 르네가 피운 사과꽃을 보셨나요? 벨기에산 사람의 나무에 사과가 열렸어요 풋 내음으로 살찐 연둣빛깔의 아오리! 반백 년을 넘게 한 자리에 있어도 루사도 매미도 저 사과만은 따지 못했나 봅니다 한 세계를 담은 어떤 기호와도 같이 눈코입이 뭉쳐져 한 알의 사과로 열렸어요 붉은빛 한 점 찾을 수 없는 어느 연인의 풋밤 같은 사과! 어설픈 사랑의 문을 두드리듯 떫은 손으로 그 꼭지를 비틀어 봐요 몇억 광년을 거슬러 올라 태초를 알리는 사람의 머리통은 아니었는지 칼을 대지 않고 쪼개보아도 될까요 사람의 나무에 사과 한 알만 덩그러니 열려 눈 코 입이 다 닫히고 말았어요 창밖은 꽃이 한창인데 왜 벌 나비 하나 날아들지 않을까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사람의 아들 중절모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우크라이나 /박민서

우크라이나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 좌표에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내년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뜻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

고백―당신께 /정해송

고백 ―당신께 정해송 물고기가 물을 떠나 한시도 살 수 없듯 저 역시 당신 품을 벗어난 몸이 되면 만유의 충만한 사랑 물 밖이라 못 삽니다 그 사랑 인력으로 해와 달이 이어가고 보관 같은 별자리가 영원 속에 빛나는 밤 당신의 그윽한 음성 가슴 속에 새깁니다 이름 모를 들풀들이 금종, 은종 소리 달면 풀꽃 빚는 실바람은 당신의 입김임에 마음 속 빗장이 풀려 제 영혼도 벙급니다 ㅡ『개화』(2022, 제31집)

꽃 지는 날엔 /김경미(金京眉)

꽃 지는 날엔 김경미(金京眉)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 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동안 별빛 보며 세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이십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이십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

침묵에 바치는 노래 /김왕노

침묵에 바치는 노래 김왕노 바람 너머 중앙고원에서 곁에 없는 네 생각에 안겨 사는 동안 차가운 조약돌 같은 나는 가끔 죽은 별이 다시 빛나듯 즐겁기도 했으니 내 마음은 해갈이 했다가 다시 피는 꽃나무 같았으니 슬픈 추억이 나를 깨워 앉혀도 바다로 가는 길이 멀어도 백년 묵은 쓸쓸함이 거대한 지네나 독을 뿜는 두꺼비 같이 돌아와도 침묵의 시위를 하는 중앙고원의 새와 꽃과 짐승의 마른 똥 타는 냄새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불러주는 노래, 침묵에 바치는 노래 중앙고원에 야크가 울면 나는 그간 팽개쳐둔 먼 이름을 그리워해야 한다. 유목 같이 사랑을 기르려고 떠돌아야 한다. 내 그리움의 연쇄반응으로 다시 시작되는 너를 향한 그리움 다시 시작하는 사랑, 빗장을 활짝 열어젖혀 다시 부를 푸른 휘파람 그것은 우리가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