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우크라이나 /박민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11. 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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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 좌표에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내년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뜻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아픈 식탁만 가득하다

  오늘 우리의 저녁이 저들의 폐허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면

  지상의 온기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은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까



ㅡ『시산맥』 (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