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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인 양
심언주
풀밭에서 양들은
뭉치면 한 마리, 흩어지면 백 마리.
몰려다니는 양들 따라 바뀌는 풀밭의 지도.
양은 처음 보아요, 딸은 토끼띠, 벨기에로 향하는 기차 밖으로 소도 말도 양도 보이는데, 소나 말은 알겠는데, 양은 처음 본다고 딸이 말합니다. 양털 이불도 덮어주고, 양떼구름도 보여줬는데 딸은 토끼띠, 나는 호랑이띠, 양을 그려보긴 했는데, 양을 세어보긴 했는데……
엄마, 양은 처음 보아요.
처음이라 말하는 순간 처음은 사라집니다.
양이라 말하는 순간 양은 사라집니다.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양이 풀을 뜯습니다.
양양에도 대관령에도 딸을 데리고 갔는데, 양떼 목장에 가긴 갔는데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눈썰매만 탔습니다. 갈대를 뭉쳐놓은 듯 몰려다니는 양은 안 보여주고, 새하얀 양만 그리게 했습니다. 번제를 올리느라 화면에서 양이 피를 뿜을 때 딸의 눈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은 안 보여주고 양 주변만 맴돌게 했습니다.
—시집 『처음인 양』(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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