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스리슬쩍, 사과 /김찬옥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11. 2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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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슬쩍, 사과

 

김찬옥

 

 

르네가 피운 사과꽃을 보셨나요?

벨기에산 사람의 나무에 사과가 열렸어요

 

풋 내음으로 살찐 연둣빛깔의 아오리!

 

반백 년을 넘게 한 자리에 있어도

루사도 매미도 저 사과만은 따지 못했나 봅니다

 

한 세계를 담은 어떤 기호와도 같이

눈코입이 뭉쳐져 한 알의 사과로 열렸어요

 

붉은빛 한 점 찾을 수 없는

어느 연인의 풋밤 같은 사과!

어설픈 사랑의 문을 두드리듯

떫은 손으로 그 꼭지를 비틀어 봐요

 

몇억 광년을 거슬러 올라

태초를 알리는 사람의 머리통은 아니었는지

칼을 대지 않고 쪼개보아도 될까요

 

사람의 나무에

사과 한 알만 덩그러니 열려

눈 코 입이 다 닫히고 말았어요

창밖은 꽃이 한창인데 왜 벌 나비 하나 날아들지 않을까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사람의 아들

중절모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우주

 

사과밭을 경작한 진짜 주인을 본 일이 없으니

뱀의 혀끝에서 사과 꽃이 피었다 한들 어찌 따져 물을 수 있겠어요

 

황무지엔 사람의 나무를 옮겨 심을 수 없어

사람의 눈에 박힌 사과를 스리슬쩍 겁 없이 딸 수밖에 없었지요

제 눈엔 오직 푸르딩딩한 사과,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으니까요

 

해와 달도 지켜보기만 하던 사과를

난해한 바람마저 비켜 갈 수밖에 없는 사과를

난 무지의 손톱밖에 가진 게 없어

감히 그 꼭지를 비틀었어요

 

색채와 음악이 흐르는 어수선한 틈을 타

수리수리 사과를 훔쳐 먹고 말았어요

제 입속에서 과즙이 스르르 기어나와요

 

난 그만, 에덴동산에서 살던 뱀을

어느 미술관에 풀어주고 말았어요

 

    

 

―웹진 『시인광장』(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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