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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슬쩍, 사과
김찬옥
르네가 피운 사과꽃을 보셨나요?
벨기에산 사람의 나무에 사과가 열렸어요
풋 내음으로 살찐 연둣빛깔의 아오리!
반백 년을 넘게 한 자리에 있어도
루사도 매미도 저 사과만은 따지 못했나 봅니다
한 세계를 담은 어떤 기호와도 같이
눈코입이 뭉쳐져 한 알의 사과로 열렸어요
붉은빛 한 점 찾을 수 없는
어느 연인의 풋밤 같은 사과!
어설픈 사랑의 문을 두드리듯
떫은 손으로 그 꼭지를 비틀어 봐요
몇억 광년을 거슬러 올라
태초를 알리는 사람의 머리통은 아니었는지
칼을 대지 않고 쪼개보아도 될까요
사람의 나무에
사과 한 알만 덩그러니 열려
눈 코 입이 다 닫히고 말았어요
창밖은 꽃이 한창인데 왜 벌 나비 하나 날아들지 않을까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사람의 아들
중절모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우주
사과밭을 경작한 진짜 주인을 본 일이 없으니
뱀의 혀끝에서 사과 꽃이 피었다 한들 어찌 따져 물을 수 있겠어요
황무지엔 사람의 나무를 옮겨 심을 수 없어
사람의 눈에 박힌 사과를 스리슬쩍 겁 없이 딸 수밖에 없었지요
제 눈엔 오직 푸르딩딩한 사과,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으니까요
해와 달도 지켜보기만 하던 사과를
난해한 바람마저 비켜 갈 수밖에 없는 사과를
난 무지의 손톱밖에 가진 게 없어
감히 그 꼭지를 비틀었어요
색채와 음악이 흐르는 어수선한 틈을 타
수리수리 사과를 훔쳐 먹고 말았어요
제 입속에서 과즙이 스르르 기어나와요
난 그만, 에덴동산에서 살던 뱀을
어느 미술관에 풀어주고 말았어요
―웹진 『시인광장』(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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