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붉은 오디션 /박라연

붉은 오디션 박라연 첫눈이 온다 종일 처음이 내린다 하얀 눈송이 사이로 '너의 무지개가 산다'는 문장이 내려온다 어디에 ​ 무지개가 사는지 여전히 모르지만 어둠의 아랫마을에 우리 이야기의 처음이 산다면 내려가는 어둠과 울음의 경사를 ​ 관객이 결정한다면 ​ 검은 밤의 어깨 위에 스무 살을 걸고 시작할래요 ㅡ 뭐? 너, 무슨 오디션 프로에 참가하니? ㅡ 응 따뜻한 색이잖아! 모두 다 보잖아 ㅡ 스물은 너무 아련한데? ​ 그 먼 기억의 숲을 모셔오려면 요절이 불가피해요 아련함이 숲마저 요절시키면? 늙은 요절을 어디에 쓰나? ​ 관객은 또 숨죽여 지켜볼 텐데 ​ 벼랑 사이에 냄새를 뿌릴까 해요 나만의 냄새를요 몸의 화산이 폭발되도록 50가지 무지개로 나누어지도록 ㅡ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ㅡ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내려다볼 수 있는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야 볼 수 있을까 말린 과일을 접시에 담으며 먼저 늙겠다는 네가 어느 순간 늙어 시계가 걸린 벽을 바라보았다 너의 테 없는 안경을 쓰고 양 떼가 이동 중인 초원을 거닐 수 있다면 움트는 새벽을 맞게 될지도 몰라 그간의 일에 슬픔이 빠지고 ​ 사람의 손을 네가 먼저 덥석 잡아 줄 리 없으니 내가 아는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너에게 오는 사람이 지금의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 나는 살갑게 네가 올려다볼 세상을 상상하면서 조금 더 늙어 버려 식탁에 앉아 말린 과일을 놓고 생애주기가 다른 바다생물 이야기에 벌써 눈부신 멸망을 본 듯 말하고 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을 우린 아직 버리지 못..

저 말이 가자 하네 /​오승철

저 말이 가자 하네 ​ 오승철 ​ ​ 사진작가 권기갑의 말 한 마리 들여놨네 고독은 고독으로 제련하란 것인지 삼백 평 눈밭도 함께 덤으로 따라왔네 ​ 10년 넘게 거실 한 켠 방목 중인 그 말이 불현듯 투레질하네 이 섬을 뜨자 하네 나처럼 유목의 피가 너에게도 있는 거냐 ​ 살아야 당도하는 사나흘 뱃길인데 해남인지 강진인지 기어이 가자 하네 고향도 하룻밤 잠시 스쳐가는 거처란 듯 ㅡ반연간『화중련』(2022, 하반기호)

서쪽 /서주영

서쪽 서주영 저무는 것들처럼 당신의 등도 서쪽으로 굽어 있다 하루하루의 눈동자와 저녁의 어깨 위에 슬픔을 으깨어 얹은 당신이 앉아 있다 저문다는 건 바람에 긴 그림자가 힘없이 흔들리는 것 그리움이 옅어지고, 계절이 쓸쓸해지고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저녁이 내려앉은 굽은 각도에서, 펼 수 없는 서쪽 모서리에서 당신과 나의 지난 시간이 염분처럼 버석거린다 저문다는 것은 서쪽으로 애증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 등이 굽은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다독인다는 것 ―『월간문학』(2022, 11월호)

나는 나를 쉽게 미화한다 /정국희

나는 나를 쉽게 미화한다 정국희 괜히 약속을 깼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나쁜 꿈으로 머리가 젖었다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뉘른베르크를 생각했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젖은 머리로 집을 나섰다 길을 따라서 그냥 걸었다 집집마다 잔디의 길이가 똑같아서 쓸쓸했다 쓸쓸해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나를 궁리하며 걸었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나는 음계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놀림이 더딘데다 눈썰미까지 없어 배우는 것에 느려도 줄기차게 연습하면 못할 것도 없지 블루베리를 먹는 꿈이 아니고 슈바인스학세를 먹는 꿈도 아니었다 썰물 빠진 바다를 걷다가 돌아보니 밀물이 밀려와 길이 막혀버린 꿈 육지가 저 멀리 보이고 숨이 막혀오고 내 머리로 죽음이 쏟아지던 꿈이었다 어느 집에선가 풍겨오는 브뢰첸 빵 냄새가 젖은 머리를..

저수지에 걸려든 낮달 /이윤소

저수지에 걸려든 낮달 이윤소 저수지 한편 덩그마니 서 있는 버드나무, 갓 돋아난 꽃망울이 미끼일까 회창회창 휜 가지를 물속에 드리우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입질이 오지 않는다 빛을 끌어 와 가지 끝에 모으고 물결을 따라 찰랑거려도 수면 위로 새 한 마리 스치며 날아가버린다 바람이 잦아들고 버드나무 밑 그림자가 햇살에 졸다가 정오의 정수리를 벗어날 즈음 기슭의 물결도 삐걱거린다 물이랑이 천천히 우측을 통과할 때 팔딱거리는 입질 하나, 바람이 냉큼 낚아챈다 제 몸을 터는 물방울 봄날의 정적에 걸려들었다 살림망 같은 구름 속에는 낮달 한 마리 걸려 있다 ―시집 『고요한 물음표』(현대시학, 2022)

겨울의 기억 / 조헌주

겨울의 기억 조헌주 겨울에는 선線들만이 살아남는다. 황태 덕장에 내어걸린 겨울은 한여름 찌운 잉여의 살들을 마른 바람이 새긴 결 따라 살뜰히도 뾰족하니 잘도 빼내어 말렸구나. 시냇길 옆으로 난 마을 길 따라 듬성듬성 난 바람결 따라 녹이 슨 대문들 지나 메마른 형태들로 흩어놓은 쓸쓸한 겨울의 추상抽象을 본다. 닫힌 대문 밖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이름 모를 화분 하나 풀이 죽어 놓여있고 풍성한 잎새에 가려 한여름엔 보이지 않던 고단하게 늘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힘겹게 부여잡았다. 빨랫줄에 널린 몇 마리 참새들 바람에 일렁이며 외로이 펄럭일 때 높은 나무 덩그러니 심장처럼 박힌 까치집은 언제나 겨울엔 더 커져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동심 묻은 앳된 낙서가 폐가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은 햇살 받아 따사로..

병을 나눠 먹는 순두부 /천수호

병을 나눠 먹는 순두부 천수호 함께 순두부를 먹는 날이었다 순한 것이 우리를 수그리게 했고 뜨거운 것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식당에는 순두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하고 냄새까지 순해진 뚝배기를 앞에 놓고 둘은 숟가락을 넣었다 뺐다 했다 폐질환을 나눌까요 간질환을 나눌까요 가능한 많은 병을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다정해도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병명도 주고받지 못했다 주소는 달랐지만 통증을 나누기엔 적절한 사이 몇 개의 병을 예약하고 우리는 좀더 정중히 순두부를 퍼먹었다 뚝배기가 받는 절은 어떤 기원처럼 병을 잘 스미게 했다 ―시집『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문학동네. 2020)

버드 스트라이크* /우남정

버드 스트라이크* 우남정 철새들이 돌아온다 유리에 빗살무늬가 생긴다 작은 몸 어디에 항로가 그려져 있을까 잃어버린 길 혼자 지나가고 철새도래지에서 AI가 검출됐다는, 삼 킬로미터 내의 닭과 오리들이 매몰되었다는 뉴스가 뜬다 비행기 한 대 날아오른다 아파트들이 전광석화처럼 깜박이며 새를 쫒고 있다 불현, 섬망처럼 날아오르는 새 떼들 몇몇은 비행기에 부딪치고 어쩌다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몇은 어마어마한 비행기 동체를 옥수수 밭에 불시착시켰다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어머니의 꺼진 엔진 속에서 어린 청둥오리 끼룩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비행기가 조류와 충돌해서 일어나는 사고 ㅡ시집『뱀파이어의 봄』(천년의시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