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해동 /이삼현

해동 이삼현 네 식구였던 입이 둘로 줄어들자 먹을 것들이 남아돈다 미처 먹지 못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가래떡을 출출할 때 드시라며 꺼내놓은 아내는 일하는 게 더 편하다고 알바하러 갔다 한파경보가 내린 날 냉동되었던 떡이 먹기 좋게 말랑말랑해졌을 즈음 아파트 세대를 돌며 소독하러 왔다고 벨을 누르느라 손발이 꽁꽁 얼어붙지나 않았는지 얼었다가 녹았다가 사는 일이 꼭 커다란 냉장고에 들락날락거리는 것만 같아 겨울이면 얼었다가 여름이면 녹기를 반복한다 긴장과 해이 딱딱해졌다가 다시 말랑말랑해진다 넷이었던 식구가 둘만 남았어도 밥상을 준비하는 아내 손은 쉬 줄어들 줄 모르고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끓일 때마다 장가가고 없는 2인분까지 넉넉히 준비한다 함께 먹지 못해 남겨진 아쉬움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일은 첫째 몫..

해빙 /이삼현

해빙 이삼현 6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2호선에서 환승해 곁에 앉은 나어린 처자가 슬며시 머리를 기대 오네 그만 황송하고 죄송해 어찌할 바를 몰랐네 삼촌뻘 되는 사내 무엇에 끌려 다가오는 것이 황송함이라면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덥석 한쪽을 내주고도 태연한 것은 아내에 대한 죄송함이었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난감해하는데 아랑곳없이 곤한 자세로 단꿈을 꾸네 붉은 머리가 예쁜 오목눈이가 포르르 날아와 앉은 가볍지만 진중한 그 떨림에 가지만 남아 앙상한 겨울나무도 따라 흔들렸을까 아님, 한겨울이라는 걸 잊고 깜박 핀 진달래도 철없이 기대 오는 한 줄기 훈풍에 물든 연분홍일까 지긋이 전해오는 풋것의 온기에 다시 녹지 않을 것 같던 얼음장이 풀리고 있었네 한쪽 어깨부터 맥없이 ―『모던포엠』(2023, 2월호)

달팽이의 기억 /조광자

달팽이의 기억 조광자 생의 전부를 가두어온 담장 모퉁이에서 이상(李箱)의 날개를 보았다 이상의, 이상을 향한 접신의 순간에는 아슬한 희열을 동반한 분열 증세가 한나절 지속되었다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날개도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날개를 달아본 적 없었으므로 결코 원적이 될 수 없는 저곳이 생존의 본능만이 바닥을 치는 저곳이 유배당한 지구에서 피를 토하며 멜론을 달라고 부르짖었다는데 죽어가면서야 고향의 향기를 기억해내다니, 밑바닥에서 걸어온 고행의 길이 손바닥 안이라고 뿔을 쫑긋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저것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문학의전당, 2022)

바람의 수화(手話) /문현숙

바람의 수화(手話) 문현숙 침묵은 침묵이 알아듣고 고요는 고요가 알아들어 저절로 깊어지는지 미루나무 이파리는 귓등을 타고 올라 말속 말을 찾아 내게 말하죠 나무의 말,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덥석, 마음 먼저 쏘아 올려도 만질 수 없는 당신 내 발걸음 소릴 내가 들으며 산소 가는 길 바람이 끌어다 놓았나 당신, 발걸음 소리 천천히 뒤 따라 걸으며 괜찮다, 괜찮다 이만하면 괜찮다 가지를 흔든다 만져지지 않는 바람의 수화를 옮겨 전하는 이파리들 그, 낮은 속살거림이 묘비명 새겨진 묵언의 말씀되어 흠칫, 놀란 내 목덜미를 만지면 아버지 천 갈래 만 갈래 다녀가는 소리 절로절로 깊어가는 바람의 손짓들 ​ ―계간『서정시학』(2022, 봄호)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명희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명희 나는 나무의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내미는 동그란 열매를 손가락으로 받아먹었다 열매는 구운 은행처럼 연한 연두색이었고 말랑말랑했다 혀끝으로 열매를 굴리자 입안에서 노랗고 비린 피라미 맛이 났다 노란 알갱이에서 어린 피라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파닥거리며 입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입안이 간지러워라고 말하자 나무의 눈이 내 손을 잡아 그리고 눈을 감아라고 말했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네에서 막 내린 것처럼 잠시 흔들렸다 마음으로만 눈을 떠 그럼 날 수 있을 거야 나는 홀린 듯 심장 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두 눈을 꺼내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집게처럼 눈꺼풀을 열었다 작고 낮은 웃음소리가 먼저 흘러나왔고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이기 ..

입춘立春 /송기흥

입춘立春 송기흥 고흥읍 오일장 입구 노점의 고무 함지에서 손바닥만 한 가자미들이 흰배를 까뒤집으며 허공으로 팔딱팔딱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들어 올려 땅바닥으로 패대기를 쳐대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손질을 하려고 보니 아이고머니! 제 몸의 절반은 됩 직한 알 주머니 가득 찬 수천만 개의 노란 알들이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어미의 심정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시집『햇살을 구부리다』(천년의 시작, 2021)

바람의 기억 /홍명희

바람의 기억 홍명희 바람은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바람의 흔적을 찾아 근원지로 달려갔을 때 이미 바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종적을 감춘 바람의 동굴 속에서 미세한 숨소리를 더듬어 그 옷깃을 잡으려는 것은 바람 속에 녹아 있는 에스메랄다 향을 모아 주머니에 담으려는 것과 같은 몸짓이다 벼락을 동반한 빗속이나 높은 산을 넘을 때를 제외하곤 바람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는 몸속에서 진액을 뿜어내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천사의 머리카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양귀비의 넋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민들레의 웃음도 바람을 타고 기구처럼 날아간다 지혜로운 여인은 젖은 옷을 말리고 아이들은 하늘로 연을 날린다 수명을 다한 꽃잎은 바람을 핑계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람의 기억은 내려앉은 꽃잎..

​내가 걷는 땅 /함태숙​

​내가 걷는 땅 함태숙 ​ 저는 지나가는 옵저버이겠으나 이 땅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고 있 습니다 신들이 즐겨 입술을 대는 맹세에 차오르는 두 개의 떨림을 기도하 는 양손을 기도하는 양손을 모으듯이 밑으로 길게 흐르는 원추형 몸을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환영이여 석영처럼 각이 져 반짝이는 지 상의 가장 나쁜 쪽으로 건조한 추상의 고원위로 누추한 오두막과 다정한 찻잔과 그리고 낮은 음역대에서 길들이는 땅 속의 구름 빛마다 닿는 다른 면적에서 각기 다른 맛을 지닌 채로 시 간은 저 마다의 고유함을 익히고 정오의 긴 묵상이 순례의 행렬을 늘이는 공중의 땅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는 지나가는 옵저버 먼 곳의 태양을 등지고 어루만지면 빛과 그림자, 손가락 틈새로 당 신의 빰을 만지던 그 감촉이 다..

너무 많은 여름​ /강재남​

너무 많은 여름 ​ 강재남​ 좀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삶으로 가요 좋은 여름과 여름이 키 우는 대로 크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요 어정쩡한 날씨는 버려두 고요 비는 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대요 누군가 말한 것 같은 데 생각을 굴려도 굴러가기만 하네요 빗물 고인 자리에 여름이 우 거져요 여름이 슬퍼요 생각을 버리기로 해요 딴청 부리기로 해요 나는 걷고 있어요 발자국 있는 곳마다 대추야자나무를 심어요 대추야자나무 열매 를 거꾸로 키워요 배경으로 걸어두기 좋은 구도로요 여름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말라가는 여름은 생략하면 그만이고요 스물여섯은 견디기 힘든 숫자였어요 그래서 발자국은 말을 잘 듣질 않았나 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표정 난해하고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