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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명희
나는 나무의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내미는 동그란 열매를 손가락으로 받아먹었다
열매는 구운 은행처럼 연한 연두색이었고 말랑말랑했다
혀끝으로 열매를 굴리자 입안에서 노랗고 비린 피라미 맛이 났다
노란 알갱이에서 어린 피라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파닥거리며 입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입안이 간지러워라고 말하자 나무의 눈이 내 손을 잡아 그리고 눈을 감아라고 말했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네에서 막 내린 것처럼 잠시 흔들렸다
마음으로만 눈을 떠 그럼 날 수 있을 거야
나는 홀린 듯 심장 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두 눈을 꺼내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집게처럼 눈꺼풀을 열었다
작고 낮은 웃음소리가 먼저 흘러나왔고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예수님이 눈먼 장님의 눈을 뜨게 했을 때, 장님의 눈에 처음 세상이 비추인 모습.
―시집『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지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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