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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기억
홍명희
바람은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바람의 흔적을 찾아
근원지로 달려갔을 때
이미 바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종적을 감춘 바람의 동굴 속에서
미세한 숨소리를 더듬어
그 옷깃을 잡으려는 것은
바람 속에 녹아 있는 에스메랄다 향을 모아
주머니에 담으려는 것과 같은 몸짓이다
벼락을 동반한 빗속이나
높은 산을 넘을 때를 제외하곤
바람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는
몸속에서 진액을 뿜어내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천사의 머리카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양귀비의 넋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민들레의 웃음도 바람을 타고 기구처럼 날아간다
지혜로운 여인은 젖은 옷을 말리고
아이들은 하늘로 연을 날린다
수명을 다한 꽃잎은 바람을 핑계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람의 기억은
내려앉은 꽃잎 속에 담겨 있다
―시집『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지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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