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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여권
정한용
여권을 새로 만들었다. 수십 년 만에 바뀐 새 여권은 표지를 푸른색
으로 입혔고, 로고와 디자인도 훨씬 세련되어졌다. 보기 좋으니 성능
도 업그레이드되었을 테다. 세상 밖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
다면, 이제 떠나야지. 어디가 좋을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먼지 나
는 시골길을 다시 걷고 싶다. 터키와 그리스 쪽 지중해 바닷가 마을
에서 두 달쯤 사는 건? 폴리네시아 남태평양 이름 모를 섬에서 다이
빙 실력을 뽐내고 싶기도 하고. 남미도 가야 하는데 거긴 체력이 받
쳐줄지. 호주와 뉴질랜드 가서 캠퍼밴으로 대륙을 일주하는 것도 좋
을 텐데. 꿈은 즐거운 활력이니, 날 말리지 마세요. 지구를 세 바퀴쯤
돌고 나면, 이젠 어머니가 계신 안드로메다에 가고 싶다. 혹시 거기
아니 계시면, 이번 나사에서 새로 공개한 푸른 은하를 찾아갈 것이
다. 어쩌면 거기로 자리를 옮기셨을 터. 엄마 만나면 어릴 적 먹던
풀빵과 도토리묵을 만들어 달라 조를 것이다. 밀가루와 도토리는 우
주 어디에서나 흔할 테지. 아니어도, 괜찮다. 영원히 원위치할 수 없
다 해도, 내 여권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계간『시와 경계』(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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