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5] 저녁에 - 김 광 섭
살아온 날들… 그 글썽임이 별빛으로 빛나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일러스트=클로이
사랑은 서로 껴안는 것이다. 함께 살며 나란히 앉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 저녁이 내리는 뜰에 내려가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이 있다. 하늘의 눈동자에 눈 맞추는 사람이다. 하루의 삶 중에서 가장 경건한 시간일 것이다. 반성과 겸손의 시간이다. 일 년으로 치면 가을이고 인생으로 치면 노년이다. 차분하게 어둠 속을 응시하며 살아온 날들을 정리해보는 시간. 하나 둘 생겨나는 별과 함께 하나 둘 되살아나는 기억 속의 인연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 다정한 웅얼거림처럼 유난히 빛나는 딱 하나의 별. 아내여도 좋고 아들이어도 좋다. 뼛속 깊이 새겨진 연인이어도 좋다. 그 글썽임, 가슴 깊이 저려오는 글썽임이 빛난다. 밥을 먹으며 삼킨 눈물, 길을 걸으며 혼자 웃던 웃음, 앓아 누워 그립던 손길, 이제는 덤덤함 속에서 문득 빛을 튕기는 그 사람. 그 유별한 인연의 희로애락이 어둠의 겹처럼 차례차례 짙어지고 또 그만큼 빛을 더하는 별이 밤새도록 이마 위에서 사운 대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멀리 보내고 나서 그 보낸 이와 눈 맞춰보고 싶은 심사가 바로 '저녁에' 수없이 떠오르는 별을 헤는 일일 터. 그 중 유별나게 다가오는 별 하나를 웃음과 눈물로 동시에 마주하는, 그것은 이별 이후의 또 다른 사랑의 자세이다.
이 시에는 밤 내내 하늘을 향해 떠 있는 하나의 실루엣이 보인다. 아주 조금씩만 떠올랐다 가라앉는 어깨선. 그 숨결이 또 다른 어느 기억 속에서는 별빛으로 글썽일지 모른다.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질 한 생명의 실루엣이 슬프고도 거룩하다.
김광섭 시인(1905~1977)은 다양한 경력의 시인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1세대 해외문학파의 일원이었고 일제 하에서 긴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였으며 금광을 운영하기도 했다. 신문사와 문학지를 발행한 언론인이며 교수였다. 경무대의 공보 비서관을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으니 보통 사람은 흉내내기 어려운 숨가쁜 일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인생의 영향이겠지만 그의 시에는 〈안익태〉, 〈이승만〉, 〈고희동〉, 〈최규동〉 등등의 '인물시'가 많으며 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전망, 행사시들을 따로 묶어 말년엔 《반응》이란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의 진수는 역시 노년의 힘겨움 속에서 탄생했다. '병(病)은 앓으면서도 양식(良識)을 기른다./ 사 년 동안에/ 선량(選良) 이백 명분은 넉근히 쌓여서/ 오늘은 오늘의 슬픔이 그냥 내일(來日)이 되는/ 그런 날이다/ 크게 바랄 것도 남지 않았고/(…)(〈병(病)〉)' 회갑 지나 뇌일혈로 쓰러지고 난 후 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등과 함께 그 '노경'의 아름다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듀엣 '유심초'노래로 일반에 널리 알려졌지만, 화가 김환기의 대표적 추상화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도 높은 경지를 얻었다. 두 사람은 같은 성북동 언덕바지에 살며 사귐도 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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