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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4. 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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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3> 김사인의 ‘노숙’
“언제나 고향 돌아가 그간의 있었던 일들을 울며 아버지에 여쭐까”
  • 엉뚱하게도 멀리 카이로까지 날아와 새벽에 시인 김사인(54)을 쓴다. 그이의 고향 충북 보은 회남면의 대청호 수몰지 부근을 돌아본 건 두어 주 전이지만, 어쩌다보니 해외출장길까지 그를 안고 나섰다.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우고도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 혹은 USA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에 정작 알토란 같은 유물들을 넘겨준 이집트 사람들이나, 오래전 물에 잠긴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면서 수배와 투옥과 글쓰기로 한 세월을 보냈던 시인의 ‘노숙’을 들여다보자니 애닯기는 이쪽저쪽 마찬가지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노숙’)

    ◇대청호 밑에 가라앉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 고향 마을 곁에서 김사인 시인이 옛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아무도 모른다’)라고 시로 물었다.
    이 시를 표제로 내세워 19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시집에 발문을 썼던 평론가 임우기는 “정수리로 내려치는 우레 같은 시”라고 했다. 과연 깊고 떨리는 시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어떤가 몸이여”라고 가만히 물었을 때 그 직접적인 대상은 서울역 지하도나 남산 자락의 노숙인들이 아니었다. 물음의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의 몸이었다. 1977년 서울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그는 이른바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걸려 첫 번째 징역을 살았다.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 긴급조치 위반은 곧바로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이후 다시 1980년 ‘서울의 봄’에 잠시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이내 광주항쟁이 터졌고 그는 다시 요주의인물로 수배대상이 되었다가 이듬해 잡혀 들어갔다. 고난의 시절은 계속 이어졌다. 1989년 다시 투옥됐다가 나온 뒤로는 도피의 세월을 살았다. 두 딸과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객지를 잠행으로 떠돈 게 2년 세월이었다. 이 무렵 그 시 ‘노숙’이 나왔다.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거울’)

    겁에 질려 쫓겨온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동일 인물이다. 느린 말투에다 무방비 상태의 너털거리는 순한 웃음을 자주 웃는 그이에게서 ‘투사’의 이미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이가 지나온 저 고난의 연대, 그 20여년 세월을 들어보니 짐작이 맞았다. 그는 천생 갈 데 없는 촌사람이었고, 그 연대를 통과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깊은 서정의 울림을 전할 수 있는 힘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약방집 둘째 아들 김사인 시인이 ‘일선당’ 앞에 돌아와 섰다. 약방집 아버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붙잡았다.
    눈이 많이 내린 뒤끝이라서 전국 도로가 빙판길이었던 날, 우리는 서울에서 만나 시인의 고향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는 수몰지인 자신의 고향땅을 가려면 계곡 사이로 난 국도로 가야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지만 길이 미끄러우니 고속도로로 가자고 했다. 내려가는 내내 궁금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물었고, 그는 느리지만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쫓겨온 사내’였고 ‘떠밀려온 사내’였다. 지금은 수몰된 보은 회남면 신곡리 ‘약방집’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 인근 아이들은 그를 본받으라며 회초리를 맞아야 했고, 중고등학교는 대전으로 나와 다니다 급기야 서울의 국립대학교까지 입학한 그는 고향땅에서 선망어린 대상이었다. 약방을 하던 아버지가 어쩌다 빚에 몰려 하숙비도 못내는 처지에 몰려 우울하던 중학생 소년이 우연히 끼적거려놓은 글을 선생이 자신도 모르게 백일장에 투고해 상을 받게 된 것이 ‘글쟁이’와 연을 맺게 된 단초였다. 소문이 나서 그는 대전 지역 고등학생 문학서클에 중학교 졸업반 때 형님 누나들에게 스카웃되었다. 그 누님들 옆에 가면 가슴을 달뜨게 하는 냄새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로션 냄새였다. 그 누나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용을 써가며 시를 썼다고 했다. 그때 그가 좋아했던 세계는 미당이나 강은교,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이었다. 헌데 대학에 입학해보니 그때까지 이름도 못 들어본 ‘김수영’과 ‘신동엽’을 좋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아이구, 큰일 났더라구. 내가 여태껏 좋아했던 건 소부르주아적이고 퇴폐적인 거였어…. 참 안 좋아져서 굉장히 애먹었어요. 머리와 여기하고가 안 맞아가지고 못 쓰는 거야.”

    ‘여기’란 당연히 가슴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 분위기에서 미당의 ‘춘향유문’이 좋다고 지껄이면 완전히 보수반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술을 먹고 붓 가는대로 쓰고 나서 아침에 보면 그건 ‘옳지 않은’ 시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작심하고 ‘옳은 시’를 써놓고 나면 이건 시가 아니라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옳고 옳지 않다는 구분에 불만을 품기에는 미안하고 사치스러운, 급박하고 아픈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잡혀가서 매를 맺고 고향 동창들은 싸구려 미싱사로 쪽방에서 일하다 폐병에 콜록거리며 죽어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쯤에 이르러서야 ‘옳은 시’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로소 벗어났다고 했다. 얻어터질 만큼 터지면서 한 20년 보내니까 오금이 풀리면서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았고 편해졌다. 편안하면서도 깊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떨림이 깃든 ‘노숙’이 터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는 세 번 투옥됐고 자주 수배를 피해 잠행을 해야만 했는데 공교롭게도 매번 체포된 장소는 고향집 아버지 앞에서였다. 눈앞에서 잡혀가는 자식을 바라보아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새삼 부연할 필요도 없겠다.

    “옛 마을은 다 물 속으로 거꾸러지고/ 산날망 한귀퉁이로 쪼그라붙은/ 내 고향동네 휘 둘러보면/ 하늘은 더 낮게 내려앉아 있고/ 사람들의 눈은 더 깊이 꺼져 있고/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헌 바지 저고리/ 삭막한 바람과 때 없이 짖어대는 똥개 몇 마리가 산다”(‘내 고향동네’ 부분)

    시인은 고향에 이르러 가라앉은 옛 마을 부근의 대청호 수면을 가리키며 지금도 그때 그 마을의 고샅들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처음 시를 쓰던 80년대 중반 무렵은 고향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이 강했다. 두 학급뿐이었던 회남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졸업하면 곧바로 농사를 거들거나, 공장으로 가거나, 식모살이를 떠났다. 어쩌다 보니 자신만 동아줄을 타고 그 가난에서 빠져나와 있는 형국이었는데, 고향까지 수몰되어 해체된 상황에서 대처로 떠난 이들은 대부분 망하거나 폐인이 되어 죽었다는 소문마저 들려왔다. 좋아하던 동급 여학생은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 두고 대전의 방직회사로 갔는데 꼬챙이처럼 말라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여자아이네 교실 오른쪽 벽// 기억하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슬픈 눈 사내아이 뒷짐 지고 하늘을 보던 액자 하나// 금모래 뜰 갈잎 숲으로 나를 불러 나도 그림 속으로 쫓아들어가 뒷짐 지면 슬프게 하늘 보면 강물 소리도 날 좇아와 저희 엄마 누나 생각 얼굴 흐려져 차라리 눈 감고 흐르데”(‘5학년 2반 교실에서’ 부분)

    산 날망을 깎아 수몰지 위쪽에 새 마을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시인의 부친 김영근(83)씨는 3년 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약방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아들의 큰 절을 받고난 아버지는 두 손을 붙잡고 정겨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보은군에 사는 송찬호 시인을 읍에서 만나 일행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조한 터여서 인사만 드리고 떠나려했지만, 부친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식사를 해야 할 상황인데 서울에서 아들 일행이 찾아왔다가 그냥 훌훌 떠난다는 건 차라리 찾지 않은 것만도 못해보였다. 그래서 부친이 자주 찾는다는 대청호변 향어횟집으로 간 것인데, 그곳에서 부친의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가 홀로 외롭게 저녁식사를 하리라고 짐작한 건 쓸데없이 넘겨짚은 거였다. 노인회장을 10여년째 맡아 감사패까지 받을 정도로 그는 동네에서 즐겁게 말년을 보내는 노익장이었다. 아들과 함께 찾아온 손들을 대접해 보내려 한 그의 마음이 그제야 선명하게 읽혔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코스모스’)

    그날 저녁 늦게 읍으로 나가 송찬호 시인과 더불어 밤을 보낸 뒤 다음 날 시인을 대전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태우고 갔다. 가는 길에 요즘 관심사를 묻자 그는 자신의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풍선을 만들 때 사용하는 하얀 분가루를 뒤집어 쓴 방글라데시 어린아이들 사진에 대해 말했다. 적어도 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 아프리카 등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연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벼락부자 비슷하게 돼 가지고 그냥 막 먹고 막 쓰고 돈이면 장땡”이어서 “도대체 이런 놈의 세월에 어떻게 써야 제대로 글질을 허는 노릇이 되나 모르겠다”고 그는 너털웃음을 시종 웃어댔다. 처음 만날 때부터 큼직한 배낭을 지고 나와 왠 짐이 그리 많은 것인지 의아했는데 그는 아예 이 길로 여러 날 떠돌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카이로로 떠나는 날 전화를 넣었더니 그는 아직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다. ‘목포’도 그렇게 대책없이 떠돌다가 채굴한 시였을 게다.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 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 번은 가 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木浦’ 부분)

    jhoy@segye.com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연보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와 경제’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 시작
    ●시집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신동엽창작기금 받음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