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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4> 안현미 ‘곰곰’
'하시시' 울고있는 엄마를 찾아 세상 안 경계로 들어서다
관련이슈 :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 태백에 안현미(38) 시인과 함께 다녀왔는데, 시인을 길 위에서 깊이 만나러 다녀온 것인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 어느 날 갑자기 바뀐 엄마, 그 변신하는 엄마들’(안현미의 자전적 산문 ‘시마할’에서)의 일부를 체험하기 위해 다녀온 것인지,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앉아 있는 지금, 혼돈의 ‘하시시’ 상태다. 태백은 안현미가 태어나서 여섯 살까지 성장한 고향인데, 그곳에서 오기와 낙천과 사랑을 유년의 정서에 새긴 뒤 ‘세상 밖 경계선’ 문막까지 나아가 새로운 엄마와 살다가, 무심한 듯 따뜻했던 그 엄마가 후일 더 먼 곳으로 떠난 한참 뒤, 그네를 이 세상에 떨구고 갑자기 사라졌던 엄마를 만나러 함께 떠난 여정이었다. 처음부터 그 엄마를 만나러 떠난 건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시인의 문학공간을 찾아가는 길 위의 여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다.
◇한강 발원지 검룡소로 가는 길에 하오의 빛이 좋아 안현미 시인을 잠시 멈춰 세웠다. 어둡고 허연 빙판길과 환한 빛이 내리는 시인의 얼굴이 그네의 지나온 길을 짙은 음영으로 보여준다. 시인의 삶을 발원시킨 태백, 그 고향의 시원으로 가는 여정에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는 그네의 시 ’계절풍’을 떠올렸다.
시인은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라고 했지만 어떤 귀에는 늘 ‘오토바이 엔진 소리’처럼 들린다. 시인은 그렇게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를 내면서 자주 웃곤 한다. 짐짓 명랑하기 짝이 없는 소리인데, 애초에는 우울을 가리려는 계산법이 작동했을 테지만 이젠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습관이 되어버린 소리 같다. 지난해 ‘시인세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젊은 시인’으로 선정했고, 이제 갓 두 번째 시집을 펴냈을 뿐인데도 뭇 미디어와 시단의 각광을 받고 있는 안현미 시인이다. 어떤 힘인가.
그네는 일단 ‘타고난 시인’ 같다. 타고나지 못한 시인들이 들으면 억울하겠지만, 그네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것도 잘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살아왔다. 남인수의 노래를 남인수보다 더 잘 부르는 남자, 장동건이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이 때문에 빛이 바랬을 남자가 시인의 아버지였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따로 두고, 서른도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한 채 딸 둘을 키우던 태백 장성광업소 부근의 여인을 만나 그네를 낳았다. 아비는 탯줄을 직접 자신이 끊을 정도로, 갑자기 불어난 아우라지 강물에 떠내려가던 젖먹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로, 그 딸을 예뻐했다. 그네는 여섯 살 무렵 아버지의 조강지처에게 보내졌고, 깊은 막장과 넓은 세상의 길 위를 오가던 아버지는 늘 바깥에 있었다. 어느날 불쑥 돌아온 무법자 같던 아버지와는 그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그네는 ‘고독의 발명가’로 살았고, ‘고장난 추억’을 저장했다.
◇안현미 시인의 모친 엄정자 여사가 자신이 일하는 태백시 장성동 짜장면집 ’장성각’ 앞에서 딸과 정겨운 포즈를 취했다. 이날 엄여사는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젖은 눈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그네의 사연을 알고 떠난 여정은 아니었다. 소탈하고 과감한 성격의 시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래파’와 ‘신서정’ 사이에 낀 ‘불편’의 동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언어를 능란하게 부리는 감각적인 시인이라는 건 얼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네의 나이테에 새겨진 구체적인 무늬를 알고 떠난 건 아니었다. 태백을 향해 가는 차 안에서 물었고, 그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막힘없이 쏟아버렸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거짓말을 타전하다’ 부분)
가난해서 인문계보다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높은 ‘서울여상’에 진학했고, 졸업 후 대기업 사무보조원으로 취직해 살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과 야간반에 등록했고, 사무보조원 시절 아현동 월세방에서 살면서부터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타전하기 시작했던 그네는 결국 시인이 되었다. 그네는 김경주 김민정 같은 시인들이 소속된 ‘불편’이라는 동인의 맏언니 격인데, 정작 그네의 시는 난해한 미래파와 새로운 서정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이 지점이 미래파의 시를 해독하기 어려운 독자에게는 나름대로 가교 역할을 해주는 안현미 시인의 미덕인데, 그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생의 밀도 때문일 것이다.
스물한 살 때, 그네는 생의 크레바스에 도달했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삭발하고 산문에 들어야 하는지 막막하고 슬펐다. 한 번도 자신을 먼저 찾지 않았던 생엄마를 찾아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어린시절 기억에 남은 ‘뚱순이 엄마’를 찾아 태백으로 갔고, 장성광업소 함바집에서 만난 그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인중에 점이 있는 걸 보니 맞네” 하면서 밥을 고봉으로 퍼주었다. 그네가 태백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섭섭한 듯 술회한 쿨한 친모와의 상봉 장면이다. 태백의 첫 목적지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였다. 그네가 추천한 공간이었는데, 그건 시인이 여섯 살까지 살았던 발원지 태백과 일맥이 통하는 시원의 공간이었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거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을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 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 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계절병’ 부분)
태백이 그네 삶의 시원이라면, 그중에서도 검룡소는 시인을 발원시킨 ‘젖꼭지’인 셈이다. 검룡소까지 가는 1.3㎞의 산책길은 빙판이었다. 빙벽을 등반하듯 어렵사리 왕복한 뒤 태백으로 내려가는 길에 엄마가 장성광업소 인근 ‘자장면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시인이 발설했다. 먼저 청하긴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곳으로 갔고, 시인의 엄마가 일하는 자장면집 ‘장성각’에 들어가 시인과 생모의 3년 만의 만남을 지켜보았고, 그날 밤 그네들의 묵은 사연을 들었다.
장성각에서 나와 인근 식당에서 시인이 태백에 올 때마다 먹고 싶었다는 도루묵찌개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던 자리였는데, 시인의 어머니 엄정자(69) 여사가 드르륵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술잔이 오고가는 사이에 슬며시 물었다. 딸을 보내고 어찌 한 번도 연락을 안 했으며, 스스로 찾아와도 그리 쿨하게 대한 연유가 무엇인지. 그네는 긴 말 없이 “딸의 안부를 바위에게 물었다”고 답했다. 태백은 강원도 깊은 산중이어서 영험한 바위도 많은 모양인데, 그네는 늘 그 바위를 치면서 딸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다. 어느 바위냐고 물었더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바위였다고 엄마는 답했다. 기분이 좋으면 그 바위는 딸의 안부를 긍정적으로 전해주었고, 우울하면 아무리 그 바위를 탕탕 쳐도 슬픈 소식만 돌아왔다고 그네는 말했다. 시인의 유전자를 내려준 생모가 분명하다.
“바람이 분다/ 양귀비가 꽃피는 그녀의 옥탑방/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어제, 다녀갔다/ 하시시 웃고 있는 여자// 환각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오늘, 다녀갔다/ 사랑은 떠나지 않아도 사내는 떠났다/ 하시시 울고 있는 여자/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내일, 다녀간다/ 하시시 피어오르는 향기// 그림자를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마리화나 같은 추억/ 하시시 바람이 분다/ 아편과 같아 사내는,// 중독을 체포할 수 있는 수갑은?// 그녀의 옥탑방/ 하시시/ 양귀비꽃 붉다”(‘하시시’)
환각과 그림자와 추억을 체포할 수 있을까. 안현미 시인은 환각과 그림자와 추억을 언제든지 퍼내서 쓸 수 있는 웅숭 깊은 샘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냥 퍼내서 읊기만 한다고 시가 될 수는 없다. 타고난 언어감각과 생에 깊숙이 뿌리 내린 예민한 촉수가 없는 한 시라는 건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주목할 만한 젊은 시인’ 안현미의 첫 시집 제목 ‘곰곰’은 환웅이 강림한 태백산 천제단과 그 인근에서 여전히 살고 있거나 출향한 여인들의 생과 아무리 생각해도 곰곰 어울린다.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곰곰’)
안현미는 두 번째 시집 자서에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존재로 인해 고통받았던 여인들/ 무덤 속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 내 삶과 죽음의 공양주 보살들에게/ ‘감히’ 이 시집을 바친다”고 썼는데, 이 구절을 듣고 태백의 어머니는 그날 미안하다고 딸에게 말했다. 자장면집 ‘장성각’에서 일하는 그네는 “마늘을 깔 때 까고 또 까면 맨 마지막에는 얄부리하고 예쁜 속살이 나온다”면서 “처음 깔 때는 아프지만 맨 마지막에는 너무 예쁜 것처럼 우리 현미 시가 이거와 똑같다”고 양파를 깔 때처럼 젖은 눈으로 덧붙였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곰곰
안현미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안현미 연보 ●1972년 강원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곰곰’ 외 4편 당선 ●시집 ‘곰곰’ ‘이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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