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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29]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 탁 번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5. 5.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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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29]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 탁 번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온몸이 눈동자'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 일러스트=클로이

살아가다 보면 눈([目])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리움의 눈을 수도 없이 가지게 된다. 바람으로라도 '그 사람'에게 가려고 하고 돌멩이라도 되어서 그 사람의 발치에 놓여있고 싶다. 그 사람의 주변에 무엇이든 되어서 그의 눈에 띄고 싶고 그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 그때 우리의 눈은 신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상(萬象)이 다 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을 때, 막연히 길을 나서 보는 심사를 안다. 목적지가 없어서 한없이 느리고 둥그렇게 되돌아오는 발걸음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사람의, 그 '나섬'과 '돌아옴'의 동시적인 산보(散步)는 누군가의 말처럼 '온몸이 눈동자'가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온몸이 눈동자가 되어 가을 들판을 간다. 여름나기의 힘겨움을 넘긴 수척한 걸음이다. 바람은 서늘하고 몸은 가볍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있다. 마음 속에서 투명한 몸짓으로 내내 나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나'로 살아가고 있다. 문득 어느 논배미에 이르고 거기서 메뚜기들의 사랑을 엿본다. 평시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이 '온몸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메뚜기의 '겹눈' 속에 '익어가는 벼 이삭'이 '아롱져' 있다. '겹눈'의 의미는 생물학적 차원을 떠나 '나'는 사랑에 열중인 메뚜기의 무궁한 눈동자를 통해 벼 이삭을 바라본다. 그 벼 이삭을 그저 풍요와 결실의 상징으로만 읽지는 말자. 여물어갈수록 수굿이 휘어지는 그 '둥�'과 그것의 힘겨움까지 모두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그 짧은 산보의 막바지였을지 모른다. 인가에 다다랐을 것이다. 거기서 만난 박넝쿨에 앉아 쉬는 '배추 흰나비'는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의 '흉내'다. '저녁답의 박꽃'은 사랑이 환하게 피어날 순간을 예감케 한다. 나비의 날갯짓을 상상해 보자. 숨죽이고 고요히 두근대는 동작이 아니던가. 사랑은 그래서 제 마음을 닮은 사물들을 발견해내는 '눈썰미 좋은' 시간이 된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열락을 자연의 미묘한 풍경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목 '사랑 사랑 내사랑'은 판소리 춘향전 중에 '업고 노는 대목'을 연상하라고 그렇게 '낡게' 지었을 터.

오탁번 시인(65)은 지금 개인 문학관인 원서헌(遠西軒)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 늘 가까이 미소와 향기로 그를 지키는 이가 있으니 부인 김은자 시인이다. 오 시인은 '나의 꽃이 너의 꽃으로 날아가/ 이슬 방울로 빛나는 사랑/ 눈물 빛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면'(〈꽃과 눈물〉)과 같이는 결코 표현할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아내여 미운 아내여'라고 하고는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철새〉)자고 다짐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