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1] 사랑의 역사 - 이 병 률
'상처'에 아픈 나, 그래도 심장은 또 뛰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국문과 교수
사랑의 역사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일러스트=클로이
여행을 하다 보면 '사고 다발 지역'이라는 팻말을 볼 때가 있다. 길에도 사고가 잦은 길이 있다는 말이다. 안개가 잦은 곳이 있고 급커브 구역이 있다. 언덕과 고비가 있고 내리막까지 합하면 '길'은 어찌도 그리 삶을 닮았는지. 도시의 골목에서도 자칫 헛디뎌 크게 다치는 수가 있고, 제 방에서도 모서리에 부딪혀 죽는 수가 있다. 그렇게 익숙한 것에 다치는 것은 아마도 잠시 넋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할 때도 그렇게 넋이 나가 있기에 다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다면'(〈아주 넓은 등이 있어〉) 좋으련만 그것이 수월한 일인가. '한 사람에게' 인생 '전부'가 스몄다니!
그러한 '사랑의 역사'를, 말하자면 '인생 전부'가 스미는 사랑의 역사를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 시다. 사랑에 빠진 자들만 골목의 벽에 부딪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고 다발 구역'에서 자신의 '상처의 역사'를 읽는 것이다. 이 시는 나아가 아예 그 벽 뒤에서 산 삶을 들춰낸다.'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그 벽'은 그러나 내 의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전히 '뼈에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어가도록' 망가져 가는데도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목덜미에선 '여름 냄새'가 나니 어쩐 일인가. 사랑은 여전히 절망 같지만 희망이라는 깨달음!
이병률(41) 시인은 팔방미인이다. 방송작가이자 출판인이고, 때때로 세계를 떠도는 여행가이기도 하다. 여행을 하며 찍는 사진 실력도 프로급이다. 여행가답게 그의 시에는 길이 많이 등장한다. '장미 정원을 걸었다// 내 시는 이 한 줄이 전부여야 하는데 무어라 더 쓸 말을 찾는다'처럼 여행의 경이를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런데 그의 여행은 자신의 빈 자리를 바라보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사랑이 그의 여행을 추동하는 것일까.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나비의 겨울〉). 이렇듯 알 수 없는 누군가 다녀가기도 하듯이 우리는 또 누군가의 '빈 집'을 눈물 철철 흘리며 다녀오기도 한다. 인간은 드문 경우를 빼고는 솔직히 단 한 번의 사랑을 하고 죽지는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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