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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9] 마치…처럼 - 김 민 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6. 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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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9] 마치…처럼 - 김 민 정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얼룩'
장석남·시인·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마치…처럼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 일러스트=클로이

가장 젊고 발랄한 세대에 속한 시인은 언젠가 문예지에 자신의 시론(詩論)을 이렇게 밝혔다. '선 본 남자에게 꼭 한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지난 번 터미널 지날 때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네, 버스들이 밤이 되니까 집으로 다 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시 쓴답시고.", "네?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지난 번 두사부일체 볼 때 한 번도 안 웃었지?", "네, 한 번도 안 웃었어요, 안 웃겨서.", "너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날 밤 나는 남자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와 안 맞아줘서 고마워요. 안 그랬음 시를 몰랐을 테니까요.'

사랑은 때로 이토록 비루한 모양이다. 시 또한 이토록 비루한 것이 된다. 그럴 땐 '마치……처럼'의 저 말줄임표 속으로 들어가 두 다리 두 팔 쭉 펴고 분해된 볼펜 자루처럼 누워 자고 싶다.

어느 날 절망이 들이닥친다. 그가 떠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이다. 이유야 여럿일 수도, 없을 수도 있으리. 애초의 만남에 무슨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듯이. 그러나 다른 사람이 생겨 떠난다면 그건 최악이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울음보가 터진다. 그 울음은 자라나 빛나는 눈을 뜨고 밤을 쏘아보는 고양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동안 깊이 물들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챈다. 그 사랑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강력한 세제도 소용없다. 그것은 옅어질 수는 있어도 영원히 피의 얼룩인 채로 남는다. 수성 사인펜으로 쓰는 글자들처럼 쉽게 번져가는 사랑의 운명. 그 글자들 위로 무수한 눈물이 떨어져 글자들은 번져 갈 것이지만 사랑은 뚜껑을 닫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죽음 이후에도 진행형으로 남을 것만 같다. 그것은 한없이 하찮은 무엇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뚜껑 열린 수성 사인펜이라니! 게다가 붉은색이라니. 그 붉음이란 본문을 쓰는 것은 아닌, 밑줄을 긋거나 가위표를 치는 색깔이 아니던가. 절망스러운 이 사랑의 시선은 놀랍도록 건조하고 놀랍도록 새로운 시선이다.

그 피의 '얼룩'에 대하여 김민정 시인(32)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일 적마다 등을 먼저 돌린 건 모두가 당신. 그렇게 밀쳐졌다는 마음일 때 저는 홀로 경주에 갑니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무덤가를 걷습니다. 동산만한 무덤을 토닥이거나, 해질녘 나무 울음소리를 피해 무덤 안으로 피신할 때, 한 왕조, 한 역사, 한 세월의 허무를 비로소 몸소 체험할 때, 그 힘으로 기운을 얻어옵니다. 살아가지요, 혼자서도 아주 당당히. 마음에 실금 복잡하게 엉킨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