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7. 20. 11:17
728x90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


  『시인의 모자』라는 시집을 손에 들었을 때, 우선 1차적으로 주목하게 된 기표는 ‘모자’였다. 과연 시인의 모자는 어떤 모자일까. 베레모, 깃털 모자, 중절모 등등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그 어떤 모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시집을 모두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자 모양도 색깔도 장식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임영조라는 시인의 모자가 이제 그 구체(具體)를 갖춘 채 내게 다가왔다. 임영조가 가장 쓰고 싶은 모자는 누군가가 한평생 그 자신의 ‘영혼을 헹구는’ 소리를 듣고(보고), ‘가슴 벅찬’ 감동으로 ‘손수 짜서 씌워’준 모자이다. 그 모자는 물론 ‘돈 주고’ 살 수도 없고 ‘백’을 써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제품이어 ‘얼핏 보면’ 값싸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모자는 결코 값싼 물건이 아니다.

  그 모자는 웬만해서 구하기 힘든 최고의 수제품이며 아무나 받을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꽃다발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혼탁한 영혼을 제대로 헹구는 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런 작위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인 임영조는, 그 모자를 ‘사후에도 쓸똥말똥’하다고 말한다. 시인이라는 작위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시인의 겸손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현대시는 인간이 외부 세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느냐를 문제 삼는다. 임영조의 시의 특징 중 하나는 1인칭 화자의 정체가 선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영조의 시에 나타나는 1인칭 화자는 자신의 체험을 현란한 시적 언어로 변조시키기보다는 정직한 기억으로 밀고 나가는 화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의 내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의 됨됨이를 보게 된다. 다음의 시는 그의 내면적인 성찰이 돋보이는 시이다.

 

  길 없는 길

  -2001년 2월 15일 오후 1시 20분


  오늘 하루 적설량 23. 4센티 

  이수역 부근 ‘옛날순대국집’에 가

  늦점심 먹고 나는 홀로 걸었네

  사람도 집도 차도 간판도 지워

  세상 온통 흰 것뿐인 무색계

  길 없는 길을 마냥 걸었네

  거대한 지우개로 싹 지워버린

  눈이불 한 채 덮고 숨죽인 거리

  사당동 지나 국립묘지 앞까지

  나는 홀로 아끼듯 오래 걸었네

  이승과 저승 경계조차 지워진

  길 없는 길을 눈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겁 없이.


  많은 눈이 내린 어느 날 오후, 늦 점심을 먹은 ‘나’는 눈에 덮여 길도 흐려진 길을 걸었다.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져버린 듯한 눈 덮인 거리를 걸으며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지워지길 바란다. 사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우기는 어렵다. 너무나 선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두 세계의 합일 혹은 무화(無化)를 갈망하는 시인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객관적인 세계와 맞닥뜨리면서 어떤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하게 그 해명이 요구되는 것이 죽음의 문제이다. 죽음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삶도 무의미하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삶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색의 일환으로서, 그 경계를 지우는 1차적인 작업을 내성적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발화하는 것이다. 경계가 지워진 그 세계는 아마도 생로병사 오욕칠정이 사라진 ‘무색계(無色界)’일 것이다.

  『길 없는 길』이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조심스러운 개진이라면, 다음의 『동백꽃 패설』은 외부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세계의 개조까지도 꿈꾸어보는, 곧 가능한 세계로의 진입을 보여주는 시이다.

 

  동백꽃 패설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 주고받길래

  온통 벌게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런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화자의 의식 안에 포착된 두 그루의 동백꽃은, 서로 ‘까불’고 ‘끼들거’리며 ‘법문’을 주고받고 있다. 화자에게 있어 동백꽃 두 그루는, 무슨 법문이 그리 재미있는지 온통 얼굴이 ‘벌게’져 ‘입 다물 줄 모’르는 존재로 각인된다. 이어 ‘부처님도 손’들어버릴 만큼 황홀한 동백꽃은 ‘사미’로 은유되면서, 그 젊음과 싱그러움이라면 파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최초의 인식이 마지막에는 화자 자신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화자는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이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그 걱정이, 천지분간 모르고 깔깔거리는 사미승들에게 가당하기나 한 발상일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경쾌함이 살아나는 것이다. 파계할까 걱정하고 있는 마음이 화자의 진정한 자기 고백이다. 1인칭 화자의 개입이 때로는 엄숙하고 무거운 퍼조나를 형성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동백꽃으로 은유된 사미승들은,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파계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시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임영조가 바라보는 동백꽃이라는 외부 세계는 ‘볼수록 황홀’하다. 『동백꽃 패설』은 동백꽃에 대한 임영조의 존재 방식을 잘 보여준 시이다. 하지만 그 외부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습으로의 재창조를 유도한다. 사미승에 해당하는 원관념과 동백꽃에 해당하는 보조 관념의 동일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하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수록 시는 울림이 크다. 두 관념 사이에 긴장이 최고조일 때, 시는 힘을 얻는다. 그 힘, 곧 긴장(tension)은 외연(外延-extension)과 내포(內包-intension)의 거리가 멀수록 그 강도가 높아진다.

  우리는 이러한 돌연한 결합에서 놀라운 시적 긴장을 느낀다. 여기서의 동백꽃은 겨울 끝 무렵에 피는 붉은 꽃이라는 단순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발랄하고 웃음 많은 사미승들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제3의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 것이다. 꽃 자체로 보면 무미건조할 수도 있는 동백꽃으로부터,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미승으로 은유된 것이다. 이러한 벗어남은 또한 대결의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사미승들의 생래적 쾌락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철저하게 적응하는 동백꽃의 이성적 자태, 혹은 동백꽃의 본능적 삶과 사미승들의 이성적 판단 등이 서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조용’하신 걸 보면, 사미승들은 파계를 목적 삼아 ‘한사코’ ‘입’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의 화자는 관찰자적 화자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화자는 코믹하게 자신조차도 관찰 대상들과 나란히 놓아보는 장면을 연출한다. 관찰 대상의 옆에 서서, 그 대상들의 눈에 띄이기를 바라는, 하지만 절대로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것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타자의 삶에,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타인의 삶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화자의 순수한 열망일 것이다. 

  이 시집의 두 번째 특징은 불교적인 것에 있다. 4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어는 단연 불교적이다. 시제(詩題) 몇 개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느티나무 타불」, 「우담바라」, 「석류 부처」, 「법주사 타종을 보다」 등등은 제목에서부터 불교적이며 내용 또한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해탈을 담고 있다.

  「느티나무 타불」의 느티나무, 500년이란 세월을 살아낸 느티나무지만, 사실 ‘얼마나 오래 속 태우며’ 살았던 세월인가, 이제 배알까지 모두 빼준 그 느티나무는 그 자리에 절 한 칸 짓고는 스스로 적멸궁이 되어버린다. 색(色)의 세계에서 공(空)의 세계로 들어서기, 그 쉽지 않은 깨우침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구원이다. 바로 그 순간, 느티나무는 드디어 타불(陀佛)이 되는 것이다.

  「우담바라」에 나오는 구원의 이미지는 ‘네가 곧 부처’이며, ‘네 마음이 절’인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부처는 3천 년에 한번 꽃을 피우는 우담화를 제 스스로 피워낸다. 우담화가 피어나자 1년 생 풀꽃들도 덩달아 피어난다. 냉이 꽃다지 덩달아 피어나는 봄날, 과연 중생들은 우담화가 꽃다지이고, 꽃다지가 우담화임을 알기나 할까.

  「석류 부처」에서도 알알이 박힌 붉은 석류알을 ‘사리’로 은유하고 있다. 석류 나무 최후의 발설이자, 마지막 화두와도 같은 석류알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런 석류알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스로 두개골 쪼개’지는 고통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온몸’ 상처의 대가로 얻은 귀한 것이라 말한다. 2연 4행을 지나면서 시인은 소극적 화자 개입을 시도한다. 불교적인 구원이 사리로 환유되었다면, 시적(詩的) 구원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화자는, 곧 임영조는 자신의 시작(詩作) 또한 잘 여문 석류알을, 스스로 두개골을 열어 쏟아내는 작업이어야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법주사 타종을 보다」에서는 타종의 임무를 마친 범종, 그 범종은 사라져버렸다는 공(空)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만들어질 때부터 속이 빈 범종의 종소리는, 그 큰 속만큼이나 크게 비워내는 종소리를 삼십삼천에 고루 흩뿌린다. 그 종소리는 ‘비운다는 생각까지 비우는 소리’이기 때문에 범종은 사라졌다. 완전한 공(空)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범종, 그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화자 또한 공의 세계로 깊이 몰입해 이미 자신을 공으로 돌려버렸다. 종소리 사라진 법주사에 남아 있는 것은 ‘색(色)과 공(空)이 경계를 서로 지운 고요’뿐이다. 경계조차 없었던, 그래서 색이 따로이 존재하지 않고 특별히 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깨우침은 「느티나무 타불」에서는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만, 여기에서는 ‘얻어맞고 깨우’쳤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임영조 시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시들이 있다. 강의 이미지를 빌어 인간사를 노래한 『강가에서 2』를 보면 섬뜩한 세상살이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다시는 사람 사는 마을로 오지 말고


  이 시는 삶의 무모성과 불모성을 극대화시킨 시이다. 50년이 넘도록 책장을 뒤적여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황폐성, 삶의 무모성은 근본적인 대안이 없다. 책장 밖이라 해도 그 사정은 일반일 것이다. 불모지대인 삶의 한 지평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 사실을 확연히 깨닫는 일일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연후라야 우리는 우리의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이 경계를 지우는 일이든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삶도 죽음도, 색도 공도, 밤도 낮도 그 경계를 지우는 그런 순간과의 만남을 해탈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말만의 해탈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 경계를 뚜렷하게 자각하는 것도 하나의 득도일 것이다. 『낙타풀』에 나온 선인장처럼,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는 데로 ‘중심 잡고 악착같이 살아’보는 것도 그 한 방법일 것이다. 아직 경계도 지우지 못하고, 아직 경계를 뚜렷하게 자각하지도 못한 우리들 모두는 열심히 사는 것밖에 방법이 없음을 분명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한국디지털도석관>

http://kll.kll.co.kr/element_express/pg_serialview.php?no=8083&pg=7&pn_0=2&pn_1=20&sn_0=2&sno=109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