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비정규직의 삶과 죽음

정규직 꿈 꾸며 14년 계약직 운전기사
“2년만 기다려”란 약속 매번 깨어져
넘기 힘든 장벽 앞에 투신자살 마감
경향신문 | 정희완·이효상 기자 | 입력 2012.06.22 21:24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심모씨(39)는 직업이 '사장님 운전기사'다. 고교를 졸업한 뒤 밥벌이로 시작한 게 운전이었다.

차분한 성격에 깔끔한 용모를 가진 심씨는 입이 무겁고 용모 단정한 사람을 찾는 사장 운전기사로서는 제격이었다. 1998년 한 디자인업체 사장 차를 몰며 첫 운전대를 잡았다. 8년간을 그와 함께 일했다. 심씨를 고용했던 인력업체 사장은 "면접 봤을 때 인상도 무척 좋았고 주변 사람들도 매우 성실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새 사장을 만났다. 이번에는 성형외과 원장이 그의 주인이었다. 그와는 1년을 일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급 승용차를 몰며 폼도 잡았지만 뭔가 허전했다. 항상 자리가 불안했다. 사장이 불러 "그동안 수고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새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비싼 외제차는 아니더라도 아침에 출근한 뒤 저녁에 퇴근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월급 외에 보너스를 기다리는 설렘도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계약직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남들이 누리는 이런 평범한 것조차 그에게는 꿈이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살며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다. 보너스를 모은 뒤 치아가 약해 고생하는 아버지의 틀니를 해주고 싶었다.

부모는 애완견 분양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심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심씨 가족은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본래 살던 서울 중랑구에서 최근 경기 남양주로 집을 옮겼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2008년 3월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에 입사할 기회가 찾아왔다. 보안업체인 삼성에스원의 고위 임원이 타는 차를 운전하게 된 것이다.

2년 계약직 신분이었지만 꿈에 부풀었다. 그가 모신 '사장님'이 "2년 뒤에는 내가 널 책임지겠다"며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매달 230만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기대가 컸다. 심씨는 2년간 휴일도 없이 그의 차를 몰았다. 정규직 꿈에 부풀어 군소리 없이 일했다.

그러나 심씨의 기대는 곧 물거품이 됐다. 약속된 2년이 지났지만 심씨는 계약직으로 남았다.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던 임원은 다른 부서로 떠났다. 허탈감과 배신감이 밀려왔다. 심씨는 그날로 회사에 사표를 쓰고 뛰쳐나왔다.

그러나 가족들에겐 힘든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심씨는 마흔 가까운 나이에 새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대형 사료업체 사장을 모셨다. 역시 계약직이었다. 2년이 지나자 다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올 4월부터 보험사 사장 차를 몰았다.

평소 사귀어온 여자친구는 심씨가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았다. 항상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이다. 심씨는 어느쯤엔가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때를 놓쳤다.

꼬박 14년을 사장 운전기사로 일했지만 심씨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닥쳐왔다. 그는 지난 18일 근무 중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옥상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심씨는 숨지기 전 미리 준비한 사인펜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6통의 짧은 유서를 남겼다.

그는 아버지에게 "병을 고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친구에게는 "비정규직이라 서럽다. 돈 없는 게 죄인 세상. 좋은 세상 만들어달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 심성이 착하고 여리기로 소문나 있다. 심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경찰서 앞마당에는 친구 10여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심씨는 정규직이라는 높은 장벽을 오르지 못하고 매번 좌절했다. 그러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작은 난간을 넘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심씨는 15층 아파트에서 투신하기 직전 난간에 선 채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는 평소 거리낌 없이 지내던 오랜 친구 10여명에게 "사랑해"라는 마지막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의 답글은 보지 못했다.

15층 옥상 난간 옆에 남겨진 심씨의 휴대전화에는 "난 남자보다 여자를 더 사랑한다" "뜬금없다" "?"라는 친구들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정희완·이효상 기자 ros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