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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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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강해림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시집『구름사원』(한국문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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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정진경
 

 

링거액이 몸 안에 집을 지어

공중누각들을 무너뜨린다

 
비밀스런 공사장에서 맞은 망치의 상흔

두꺼운 딱지로 아물었다 생각했는데

몸은 그것을 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병원 진단서에 기재된

‘충수염 진공된’

그 망치는 여전히 내 뒤통수를 때려

오장육부 내장 깊숙한 곳에 구멍을 파 놓았다

 
정처 없이 길 헤매던 보헤미안의 시간

설빙에서 추락하는 헛꿈에 시달린 것은

그 망치질이 원인이다
 

사나흘 쏟아져 들어오는 링거액이

메마른 나를 통통하게 살 오르게 한다

촉촉한 물풀이 자라자 내 몸은 자꾸

점프,

점프를 하고 싶어 한다

‘고통 없는 세상 저 너머로’

궁핍한 이들의 희망적 메시지가 발돋움 한다

이것은 또한 핍박을 제공하는 근원처

세상은 아랫것들이 점프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점프하려 하면 야무지게 꾹꾹 눌러

망치질을 한다
 

금속성 메스로 몸을 가르고

링거액을 혈관에 들이붓는 며칠 동안

가뭄은 잠시 해소된다

 
세상에 파종하지 못한 말(言) 대신 몸이 점프, 점프를 한다

 
가열하던 태양이 잠시 나를 비켜간다

 

 

 

―계간『작가와 사회』(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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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명윤

 


  라라라,
 

   그가 봉지를 찢고 딱딱한 라면을 꺼내 들어요 그는 라면을 희망적으로
읽지요 창문 너머 훔쳐보는 고양이의 눈빛 따윈 신경 쓰지 않기로 해요

 
   라면, 라면, 라면,

 
   라면은 잠시나마 그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요 그가 부자라면 그가 실
업자가 아니라면 그가, 그가 아니라면 곧 냄비 속에서 친친 감긴 긴장을 풀
고 길이 되어 춤 출 것이죠 와글와글 끓어오를 것이에요

 
  창 밖, 장맛비가 쫙쫙 펴진 면발처럼 내려요 라면이 끓자 전화벨이 시끄
럽네요 그는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해요 지독한 고양이, 그는 달라붙는
고양이를 걷어차 버려요 만복여인숙 303호실 창문 너머 휴대폰을 든 고양이
가 떨어지네요 하나 남은 마지막 라면을 먹어치우며 그는 연신 중얼거리죠
  빌어먹을 고양이,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려요 붕대를 감은 고양이가 손바닥을 펴며 웃는
데요 이봐, 벌써 석 달이나 밀렸어,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봅니다 여전
히 장맛비가 쭈르르 쭈르르 내리는데요 얼마 못 가 거리는 퉁퉁 불어터질
것인데요,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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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동훈
 


프로테스탄트의 혁명이 시퍼렇게 싹을 틔울 때였지
갓 생리를 시작할 무렵의 13세 어린 소녀
횃불을 들고 탄광의 입구를 밝혔어
광부들이 갱도를 나오는 몇 십 분의 캄캄한 밤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야
빵 한 조각, 단지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위해서 말이지
오므린 연한 사타구니를  타고 내리는 선혈을 지켜보던 책임자는
짐승만도 못한 욕정에 소녀를 범하였지
지켜본 목격자들 모두 혀를 차면서도
생계를 위하여 잘릴까봐 못 본 척 하였던 게야
씨팔 친구의 딸이 겁탈을 당해도 말이지
탐욕의 제물로 받쳐진 사생아는 물의 혁명을 기억하지
고인 물을 엎지 못하면 위에서 물을 부어 제끼는 수밖에 없거든
죽음을 담보로 한 종교개혁자들이 필두로 나선거야
그리하여,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전된 앙금은 여전히 탁함을 자랑하지
썩어 빠진 농도의 차이뿐
튀어 오른 매연이 죽기 살기로 양복 바지춤에 앙금을 남기듯
시커멓게 속내를 감추고
가만가만 폐부를 압박하고 잠식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목격자인 하늘이 가만 있겠어

지천으로 물을 퍼붓고 흘러내리게 하여
강간의 그날을 잊지 말라고 지천을 황토 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격월간『詩와 창작』(2005년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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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최세라

   

 
그날이 우르르 몰려온다

한쪽으로 쏠리며 질주하는 천장의 쥐떼들처럼

그날로부터 하루

그날로부터 일 주일

한 달, 일 년과 16일째 되거나

내가 죽은 지 2년 89일째 되는 어느 날
 

아니면 하루살이의 전생인 어제로부터 뒷걸음질 쳐
 

한 번 꺾인 필름처럼

영사기에 걸린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
 

나에게 보내는 메일함이 넘쳐

거센소리들 쏟아지고 튀어 오르던 그 날

물처럼 금 밖으로 물러나 쏟아지는 불빛 속을 대책 없이 걷다 보면

후렴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너는 스치는 역이야 그냥 지나치는 역이야

잠깐 내려 어묵을 먹다가 구둣발로 플랫폼을 문질러 보는

숱한 날들 가운데 하루야
 

빗물에 무너지는 절개지처럼 그날이 젖어서 쏟아져 내리고

먼 빗줄기에 걸터앉아 오늘이 느린 템포로 시작되었다

 

 

 

―계간『시와 반시』(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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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최호빈

 

 

꿈을 세척하려고 잠든 눈에 새벽을 넣는다
서로에게 방자한 빛과 어둠을 뛰어 내려가다 층계에서 실수한다


지상과 결별한 나의 체념과
지상을 향한 나의 화해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졸음에 불만이었다


구석이라 불러도 좋을 표피에
순결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잎들이
꾹꾹 눌러쓴 여름


누군가로부터 익명을 즐기는 동안
그의 심장이 멈추면 안 되므로
독충들이 마비를 방지하는 침을 심는다
칭찬에 속느라
아이들이 찔린 눈을 느끼지 않는다


보잘 것 없는 한 줄을 되감는 요요처럼
뒤쪽의 외출이 개척되었다는 것을
내일쯤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름은 몰랐다
좌우가 감미롭다는 것을 알게 된 그네가
삐뚤거리기 시작했고
치렁한 장식구를 걸친 바람이
부서진 담벼락을 더듬고 있었다

 

 


―계간『다층』(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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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민서

 

  

비 온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잦아들다 격해지며


비 온다

오로지 한 길로

오롯이 한 마음으로

 
말갛게 질겨지는 이 빗줄기

낱낱이 바늘귀에 꿰어

터진 마음의 솔기를 기우면

수몰은 면할 수 있을까


비 온다

어느새 정강이를 적시고

허리 명치 지나

기어이 쇄골까지 차올라 흥건한

그리움의 벅찬 물살


그리움은

철없이 장마 지고

한없이 범람하는

내 안에 있는 외부

이번 生은

도무지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내 안으로

그대의 속으로

깊이깊이 수장되리라

 

 

 

―웹진『시인광장』(201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