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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이문열 비판 / 반경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2. 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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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 이데올로기의 안과 밖

----장정일과 이문열의 경우

반 경 환

 

 

1990년대를 생각해 보면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이 떠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이문열의 {선택]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은 그것이 ‘외설이냐 문학작품이냐’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문열의 {선택}은 그것이 지닌 고색창연하고 보수적인 시각만큼이나 여성 해방의 문제를 둘러싸고 아주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밖에도 1990년대의 문학적 사건은 이인화, 장정일, 구효서, 박일문 등의 젊은 작가들이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을 표절했다고 해서 한국문단이 떠들썩 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외설이냐 문학작품이냐’의 논쟁이나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도 낯 뜨거운 논쟁에 불과하고, 젊은 작가들의 표절 시비의문제도 낯 뜨거운 사건에 불과하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한국문학의 향상에 기여하기기는 커녕,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수준 미달의 작가 의식이 빚어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리적, 혹은 생물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일부다처제’가 옳고 ‘일부일처제’는 그만큼 인위적이고 야만적인 제도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아프리카의 얼룩말이나 사슴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고, 또한 늑대나 양의 무리들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 무리를 짓는 동물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모든 사회적 동물들 중에서 언제나 성교할 권리를 갖는 자는 가장 용기가 있고 힘이 센 자라고 할 수가 있다. 여성은 가장 남성다운 남자를 좋아하고, 남성은 가장 여성다운 여자를 좋아한다. 따라서 가장 힘이 센 자에게 성교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종의 보존과 종의 건강을 위해서 암묵적으로 ‘종족에의 의지’가 동의하고 합의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대 호색한이나 오입장이는 있을 수가 없으며, 오직 종족에의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있다. 남성은 기회가 주어지면 1년에 100명 이상을 임신시킬 수도 있지만, 여성은 쌍동이는 예외로 치고 1년에 한 명만을 출산할 수가 있다. 남성의 성욕은 그가 육체적으로 늙거나 쇠약해지지만 않는다면 무한한하지만, 여성은 아이를 배고 출산하면 성욕이 감퇴하고 한 남자만의 사랑으로도 만족할 수가 있다. 산아제한이 없었던 옛날에는 10여명의 아이를 낳고 그들을 양육하는 데 20년 내지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모든 남성의 성욕은 그 대상에 한 계가 없고 무한한 하지만, 모든 여성의 성욕은 그 대상에 한계가 있고 유한하다.

 

모든 남성은 종이 소멸될 경우를 대비해서 더 많은 씨를 뿌리려고 하지만,모든 여성은 출산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수많은 남성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남자들이 아름답고 풍만한 유방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그 여성이 장차 2세에게 영양 공급을 제대로 해줄 것인가, 아닌가를 보는 것이며, 또한 여성의 남산만한 엉덩이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그 여성이 장차 아이를 잘 낳을 것인가, 아닌가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남성은 더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고, 모든 여성은 한 남성하고만 관계를 가지려고 한다. 이것이 생물학적 욕구에 따른 종족에의 의지이며, 여성의 간통이 남성의 간통보다 더 큰 죄가 되고 있는 까닭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 철학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보다 건강하고 튼튼한 2세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 뛰어난 전사들에게만 성교할 권리를 부여하자고 주장한 바가 있는 데, 왜냐하면 종의 보존과 종의 건강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지상 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모계 중심 사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부계 중심 사회였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생물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일부다체제가 옳고 일부일체제는 그만큼 인위적이고 야만적인 제도라는 것이 드러난다. 유교와 기독교가 일부일처제를 옹호하고 정착시킨 바가 있지만, 오늘날에도 일부다처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제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앙 아시아의 회교 문화권은 예외로 간주하더라도 노동자나 농민들은 성교할 권리마저도 박탈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주영이나 이병철, 혹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는 자들은 암암리에 첩을 두거나 바람을 피울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인신매매 조직이나 성적 타락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도 퇴폐적인 향락 업소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렇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정주영이나 이병철의 첩이 되려고 하지, 노동자나 농민들에게는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 그렇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부의 분배 문제와 함께 성의 분배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부의 분배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듯이, 성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류 사회의 귀부인이나 그 딸들의 순결이 유린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의 측면에서도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어왔듯이, 성의 측면에서도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어왔던 것이다. 유교와 기독교는 일부다처제도를 전복시킨 종교이며, 반 생물학적 입장에서, 일부일처제도를 정착시킨 종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는 일부일처제도의 폐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생산성의 성을 불모의 성으로, 아름다운 성을 더러운 성으로, 사랑으로서의 성을 불륜의 성으로서 전복시킨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 일부종사를 하는 것도 미덕이 되지를 못하고, 아이를 낳고 그들을 훌륭하게 양육시키는 어머니의 길도 미덕이 되지를 못한다.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자손의 기초’를 만드는 것도 미덕이 되지를 못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탄은 종족의 탄성이라는 옛말도 미덕이 되지를 못한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일부다체제를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일처제를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문학을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지상낙원을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굳건하게 발을 딛고 있는 물적 토대는 ‘순결 이데올로기’의 바깥이며, 완벽하게 염세주의만이 자라나고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로서 불모의 성인 섹스에의 탐닉과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외디프스콤플렉스의 주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우리 인간들의 허위 의식과 성적 탐닉 현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소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와이가 여고생이라는 것, 그리고 제이가 그녀보다 꼭 스무 살이 많은 유부남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습은 여고생에게 여고생의 위치를 고수하기를, 또 유부남에게 유부남의 위치를 고수하기를 강제한다. 사람들은 사랑의 힘에 늘 놀라워하지만 그것을 언제나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국경과 이념은 물론이고 인종과 종교마저 뛰어넘는 어떤 열정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이질적인 것을 하나 되게 만드는 그 열정은 한 사회나 개체적 인간들을 참을 수 없이 위협한다. 모든 간격과 개별성을 일순에 무화시키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처치 곤란한 열정은 우리들의 고유한 위치와 존재를 무와 혼돈으로 되돌린다. 때문에 누구나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을 겁낸다. 그것은 내가 죽어 사라지는 최악의 경험이다. 개체와 자아의 불가침한 보존과 그것들의 질서로 완성되는 신성한 사회에서 그 최악의 경험은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에게마저 전율과 구토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와이와 제이의 조악스런 만남을 사랑이라고 높여 부를 수 있다면, 그들의 사랑이 용납되지 않는 이유는 거기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123면

 

 

지난 날의 여성들의 일생은 10여명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양육하는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여명의 아이들을 2년 내지 3년 터울로 낳고 그들이 육체적으로 자립할 때까지의 양육 기간은 여성들의 성을 자연스럽게 불모의 성이 아닌, 생산의 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이들을 1--2 명씩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 산아제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 양육에 20년이나 30년씩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기껏해야 7년내지 10년 미만으로 줄어든 아이들의 양육 기간은 대부분의 여성들의 성을 퇴폐적인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연분만마저도 기피를 하고 어린 아이에게 모유조차도 먹이려고 하지를 않는다. 여성의 유방도 성적인 도구일 뿐이고, 그녀들의 멋진 엉덩이마저도 단지 성적인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현대 여성들은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요염하게 자극적으로, 그녀들의 육체를 노출시기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편력해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은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의 반영이면서도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외디프스콤플렉스를 그 주제로 간직하고 있는소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군복을입고 150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군대식 규율을 강요했던 제이의 아버지와 또 역시 군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누이동생의 사생활을 사사건건 감시했던 와이의 오빠가 반동적인 인물들이라면, 삼십대 후반의 유부남인 제이와 십대의 여고생인 와이가 주요 인물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사랑은 “인종과 종교”마저도 뛰어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삼십대 후반의 유부남과 십대의 여고생이라는 사회적인 관습마저도 뛰어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그들의 사랑은 “국경과 이념”을 뛰어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고유한 위치와 존재를 무와 혼돈으로” 되돌리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 내가 사라지는 최악의 경험이면서도 그만큼 위험하고 불순한 사랑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유부남인 제이는 가사를 위한다거나 후세 교육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씹’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고 다니는, 다시 말해 새로움만을 충족하기 위해 날뛰는 색정광 돈주앙의 모습이며, 와이는 대뜸 처음부터 제이에게 “너하고 씹하고 싶다”라고 하는 창녀의 모습이다. 그래서 수없이 “너 여고생 맞니?”라는 확인성 농담이 이뤄질 정도이며, 이것은 포르노 작품의 성격에 걸맞게 와이에게 남성적인 적극성을, 제이는 그저 수동적으로 주는 것만 받아먹어도 되는 편안한 입장에 거주할 수가 있게 한다”({세계의 문학}, 1997, 봄호)라는 하태환의 말이 그 타당성을 띠게 된다. 하태환의 [포르노 문학]은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을 아주 “훌륭한 작품”으로 옹호하고 있는 글이기는 하지만, 장정일의 과도한 성적 탐닉 현상의 묘사는 그것을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기에 주저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제이와 여고생의 신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와이와의 사랑이 현대 사회의 순결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정을 위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는 ‘콘돔을 씌운 남근상’이 제시하고 있듯이, 생산성의 성을 불모의 성으로, 아름다운 성을 더러운 성으로, 사랑으로서의 성을 불륜의 성으로서 전복시킨 관점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적인 성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의 보존과 종의 건강이 어렵게 되어 있다. 아름다운 성이 자라나지 못하는 곳에서도 유토피아적인 지상낙원의 꿈이 자라날 수가 없다. 불륜의 성만이 자라나는 곳에서도 인간과 인간의 믿음이나 사랑이 자라날 수가 없다. 바로 그곳은 불모지대의 사막이며, 장정일이 기도했던 것은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신버지’(신+아버지)의 반대 방향에서 우리 인간들의 최후의 심판과 종말을 주재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주제는 ----염세주의자의 산물로서는--- 그만큼 아름답고 섬찟하기도 하지만, 그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은 조금도 감동적이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대부분이 장정일을 옹호했던 논자들은 한결같이 장정일이 모든 인간의 열정을 혐오했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변태성욕의 열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일까? 혹시, 조각가나 인간으로서의 미래의 출구가 막히고, 그 모든 것이 막혀버린 끝에, 그의 열정이 변태성욕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열역학적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가 있지만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의 역사 철학적인 의미도 따져 보지도 않고 어떠한 종족에의 의지마저도 거부하고 있는 작가의 의식을 유추해볼 때, 나는 그 말이 꼭 들어 맞는다고 생각한다. 장정일의 패배주의적이고도 염세주의적인 성향이 그의 변태성욕을 낳고 그 변태 성욕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포르노 소설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를 소재로 해서 모든 지배 체제의 가치관----특히 순결 이데올로기----을 전복시키면서 염세주의의 사제로서의 최후의 심판과 종말을 주재하려고 했다면, 그토록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주제를 이처럼 값싼 포르노 소설로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만일 장정일이우리 인간들의 인생 목표와 좌절된 꿈의 상관 관계를 성실하게 묘사하고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의미를 천착을 했었더라면 그의 불륜의 사랑마저도 상징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사건으로 전개되면서 그때 그때마다 우리 인간들의 허위 의식과 변태성욕의 장면----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다 같이 식인종적이고도 색정적인 열정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들을 가장 날카롭게 야유하고 풍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부와 근친상간의 문제를 다룬 소포클레스의 [외디프스대왕]이 외설로서의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악마에게 몸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박사와 그레트헨의 사랑이 외설로서의 문제가 된 적이 있었던가? 줄리어스 시이저와 앤토우니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남성들과 애정 행각을 벌였던 클레오파트라([앤토우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외설로서의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요정 칼립소, 나우시카, 마녀 기르케와도 정사를 벌였던 {오딧세우스}가 외설로서의 문제가 된 적이 있었던가?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그리고 문학의 자율성이 옹호되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그것이 변태성욕이든, 딸 아이와도 같은 여성과의 불륜적인 사랑이든 간에,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인 구성의 원리 안에서만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배 권력은 어떻게 성을 억압하고 순결 이데올로기를 강요해 왔던것이며, 또한 그것의 역사 철학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일부다처제도는 물론, 일부일처제도의 순결 이데올로기마저도 무너져 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의 성의 해방은 어떠한 의미를 띠고 있으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 장정일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아예 답변도 하지 못한 채, 어떠한 목표도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목표도 방향 설정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과도한 성적 탐닉 현상은, 좀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염세주의자로서의 아주 유치한 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 단순한 포르노 소설을 순결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면서 최후의 심판과 종말을 주재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이며, 성의 해방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함께,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를 등에 업고, 선전--선동적인 바람을 일으키면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했던 것이 그 둘이다. 장중하고 깊이 있는 주제에 반하여 그것을 단순한 포르노 소설로 전락시킨 작가의 역량도 유치하고, 그것을 마치, 한국문학의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것처럼 옹호하고 있는 이 땅의 비평가들의 문학적 수준도 유치하다. 또한 사직 당국의 판매 금지 조치와 작가의 인신 구속도 유치하고,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에 젖어서 낯 뜨거운 외설 논쟁이나 벌이고 있는 한국문학의 수준도 유치하다.

 

장정일이 순결 이데올로기의 바깥에 서서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를 희화화하고 지배 체제의 모든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했다면, 이문열은 순결 이데올로기의 한 복판에 서서 현대 사회의 성 풍속도를 비판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문열과 장정일의 싸움은 순결 이데올기와 반 순결 이데올로기의 싸움이기도 하고, 구 세대와 신 세대, 혹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기도 하다. 장정일이 염세주의자로서 우리 인간들의 최후의 심판과 종말을 주재하려고 했다면, 이문열은 낙천주의자로서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희망과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문열의 {선택}은 여성해방 논리의 헛점을 찌르면서 봉건 사회의 순결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는 정부인貞夫人 장씨 이야기를 천착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강요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게 마련이다. 맹목적인 순응과 적극적인 수용은 다르다. 우리 시대 여성들에게 가문은 피할 수 없는 강요였다. 그러나 나는 맹목적으로 순응한 게 아니라 그런 나름의 논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이념을 껴안았고, 그런 뜻에서 감히 가문을 내가 결혼 뒤에 첫번째로 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정부인 장씨가 살다 간 400여년 전의 조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어떠한 선택도 있을 수가 없었다. 학문이나 예술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를 않았고, 연애를 하거나 배우자를 고르는 일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를 않았다. 또한 시부모나 남편에게 말 대답을 하거나 자기 주장을 펴는일조차도 허용되지를 않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조차도 허용되지를 않았다. 모든 여성들은 부계父系의 성씨로만 특정되며, 어디까지나 가부장적인 순결 이데올로기 밑에서 칠거지악이나 여필종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인 장씨는 그 억압적인 순결 이데올로기 밑에서도 맹목적인 순응의 길이 아닌 적극적인 수용의 길, 다시 말하자면 자유 의사에 따른 선택의 길을 살다가 갔다고 이문열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정 아버님 밑에서 학문과 예술의 길도 선택했고, 그녀의 시댁인 충효당의 가문의 길도 선택했다. 그녀는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며 은거의 길을 가고 있는 자의 ‘존빈尊賓’의 길도 선택했고,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낸 그의 셋째 아들이 말해 주듯이, ‘현빈玄牝’의 길도 선택했다.

 

이문열의 {선택}은 조선 시대의 가부장적인 순결 이데올로기 아래서도 위대한 아내의 길과 위대한 어머니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현대 사회의 여성해방 운동을 정면으로 공격한 소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 일부종사를 하는 것도 미덕이 되고, 아이를 낳고 그들을 훌륭하게 양육시키는 어머니의 길도 미덕이 된다.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자손의 기초’를 만드는 것도 미덕이 되고, 일편단심 ‘군자’(남편)를 위해서 정절을 지키는 것도 미덕이 된다. 따라서 그의 순결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불모의 성이 생산의 성으로, 더러운 성이 아름다운 성으로, 불륜의 성이 사랑스러운 성으로서 변모를 하게 된다. 이러한 순결의 이데올로기는 지배 체제의 가치관을 옹호하면서, 여성해방 운동을 전개하려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더없이 가혹한 채찍으로 작용하게 된다.현대 사회는 일부일처제도가 무너져 가고 있는 사회이며, 모든 남성들이 모계중심 사회로 편입되고 있는 사회일는지도 모른다. 대부부분의 남성들이 온라인 통장과 함께 그들의 경제권을 빼앗긴 지도 오래되었고, 여성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부모형제지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파탄을 맞이하게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모든 여성들이 가족 질서의 중심이 되었고, 모든 남성들은 서서히 주변적인 인물들로 밀려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가족 관계의 파탄이나 도덕적인 윤리관의 파탄의 일차적인 책임은 이문열이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 순결 이데올로기(남근중심주의)에 있으며, 대부분의여성들이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짓밟히고 신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문열의 {선택}은 대부분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작고 사소한 현상들을 문제삼아 전체 여성들을 매도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린 양이 늑대에게 어린 양의 길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통해서 엄청난 시련과 곤욕을 치룬 바가 있는 장정일도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작가이며, {선택}을 통해서 ‘순결 이데올로기’를 주장했던 이문열도 아주 훌륭한 작가이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을 표절했다고 해서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던 이인화, 구효서, 박일문 등도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작가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포르노 소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 순결 이데올로기와 반 순결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 타인의 말과 사유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관점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 나는 그들에게 하루바삐 이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고, 위대한 21세기에는 한국문학을 더욱더 풍요롭게 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1권에서

 

 

<가져온 곳 - 다음 카페 애지문학회>

http://cafe.daum.net/ejiliterature/Q8K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