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국어 선생님 ⑪ 시를 노래하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1. 21. 23:16
728x90

 

시를 노래하다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일까? 배움의 콘텐츠가 사방에 널렸는데 왜 학교에서는 교과서만 붙잡고 밑줄을 긋고 핵심 내용을 정리하는 수업을 해야 할까? 수많은 읽기 자료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학생이 국어를 잘하는 학생일까? 삶과 동떨어진 텍스트는 교실 밖에서 아이들의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교실이 좁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그 안에서 얼마나 큰 세상을 상상하고 있을까?

 

교실 문을 나서는 내 뒤를 늘 따라다니는 질문들이다. 나는 평가를 핑계로 진도 나가기에 급급했고, 학급당 인원수를 두려워하며 새로운 수업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수업 한 시간이 아이들이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물 한 방울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늘 품고 있다.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꽤 멀리까지 가게 된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믿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꾸준히 질문만 하는 교사였다.

 

시와 노래는 한 뿌리다. 고전시가라며 배우는 작품들이 먼 옛날에는 노래로 불리던 것들의 가사이다. 현대에 와서야 시와 노래가 분리되어 아이들은 더 이상 시를 즐기지 못하고, 시를 해석하고 분석하며 갈기갈기 찢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수업을 받는다. 심지어 시를 쓴 시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해석을 외우는 어처구니없는 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게 한 몸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노래는 상업적, 대중적 콘텐츠로 자리매김했고 시는 몇몇 문인들에게만 읽히는 비주류 텍스트가 되어 노래와 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아이들이 찾는 것도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노래이지 난해하고 공감대가 약한 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문학이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는 나는 그 인문학의 정수인 시가 아이들의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시를 아이들의 삶으로 끌어들이려는 고민과 시도를 수도 없이 했다. 시를 읽은 후 감상을 노래, 유시시UCC, 손수제작물, 상황극, 그림 등으로 표현하는 활동도 해 보았고, 산문이나 만화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해 보았었다. 그 모든 시도를 아이들은 평가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참한 실패였다. 그러던 중 선배 선생님께서 제안을 하셨다. “시를 랩으로 부르자!”라는 제안이었다. 전문 래퍼를 초청해서 랩에 대한 기초부터 배운 뒤 학생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불러 보는 것까지를 수업으로 해 보자는 것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지만 교실은 여전히 한증막 같은 8월 말, 교실에 힙합 바지를 입고 헐렁한 티셔츠, 삐딱한 모자를 걸친 두 래퍼가 오셨다. 늘 교복같이 단정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교사만 보다가 티브이에서 나온 듯한 진짜 가수를 교실에서 보니 아이들은 그저 신기하기만 한 눈빛이었다.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관람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간부터 라임을 이용해서 직접 랩 가사를 써 보기로 했다.

 


“내가 매일 마시는 둥굴레차, 심심하면 나는 해 다함께 차차차.”
“학교에선 언제나 꿈을 꾸라 말해. 선생님은 언제나 벌점을 말해.”

 

 
 

교실에서 백지를 나눠 주고 시제를 주고 한 편의 시를 쓰라고 하면 끙끙대며 ‘동시’에 근접한 시들만 간신히 쓰던 아이들이 율격의 또 다른 모습인 ‘라임’으로 랩 가사를 쓰라고 하니 줄줄 잘도 쓴다. 처음으로 아이들에게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했다.

 
가사를 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축제 무대에 아이들이 올랐다. 직접 쓴 가사로 만든 노래를 전교생 앞에서 부르는 멋진 공연으로 축제를 마무리 지었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자리에 있는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며 열광했다. 비로소 시와 노래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온몸으로 아이들은 시를 받아들이고,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고 있었다.

 
자신들이 쓴 가사로 축제에 선 아이들의 모습
 

 
 

글_박현진
계산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 스스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더불어 삶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