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편 :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 버스 7211번/701번 환승 - 삼천사/진관사(하나고등학교) 하차
등산 : 삼천사 일주문 들어가기 전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가시요
→응봉능선→사모바위→승가사----(사모바위에서 비봉 가기 전에 왼쪽 승가쪽으로 하산)
응봉능선(매봉능선)
응봉능선은 사모바위에서 북서쪽(삼천사 방향)으로 뻗어 내린 약3km 거리의
능선이다. 1968년 1.21사태로 28년간 폐쇄되었다가 1996년에야 개방이 되었
으며 응봉능선의 시작점인 사모바위는 사모관대의 사모 즉 사각모자에서 유
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모(思慕)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청년이 그대로 바
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육산길과 암능길로 어우러진 응봉능선은 왼쪽으로는 의상능선과 문수봉, 보현봉
까지, 능선을 오르는 정면에서 우측으로는 비봉능선과 향로봉까지의 조망권이 아
주 뛰어나다.
<▲ 삼천사탐방지원센터/산행 들머리>09.09.06
올해는 꽃 핀 것을 못 보고 지나갔는데 어느 새 오밀조밀하게 씨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삼천사 올라가는 길에 만났는데 달밤이 아니라 대낮에 강강수월래 하듯 손잡고
빙빙 도는 모습이 하나하나 요정처럼 예쁘기도 합니다.
<▲ 삼천사 삼거리 길>
응봉능선을 오르려면 오른쪽으로 붙어 산 기슭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삼천사까지는 300미터. 잠시 삼천사에 들려서 부처님을 배알하고 가기로 합니다.
오늘 이곳으로 산행한 목적이기도 하고.
<▲ 삼천사 입구>
절 입구 우측에 약수가 있어 물을 보충하면 좋을 듯.
가지고 간 얼음 물이 넉넉하지만 목을 축이고 들어섭니다.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127-1>
<▲ 삼천사 연못의 수련>
<▲ 삼천사 연못의 돌거북>
<▲ 삼천사 연못의 수련 꽃>
수련은 아침 10시쯤 꽃을 피웠다가 오후가 되면 차츰 꽃잎을 닫는다고 합니다.
그 래서<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은 물에 피는 연꽃이 아니라 '잠睡을 자는 연꽃'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피었다가 저녁이면 다시 오므리고 밤이면 잠을 자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연꽃에 비해 꽃이 작고 수면 가까이에 꽃을 피우며 연밥이 없습니다.
<▲ 삼천사 연못의 수련>
수련 /수련(Nymphaea tetragona var. angusta)
뿌리줄기는 굵고 짧으며 밑부분에서 많은 뿌리가 나온다. 뿌리에서 나온 긴 잎자루에 달리는
두꺼운 잎은 난형으로 물 위에 뜨고 화살촉 과 같이 중앙을 향해 갈라져 있다. 꽃은 6~7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밤에 꽃잎이 접히므로 수련이라고 한다. 꽃은 3일 동안 피었다 닫혔다 한다.
열매는 꽃받침에 싸여 있으며 물 속에서 썩어 씨를 방출하는데, 씨는 육질의 씨껍질[種衣]에
싸여 있다. 시든 꽃은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열매도 물 속에서 맺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
아 연못의 관상식물로 적합하다. 민간에서는 지혈제로 이용한다.
뿌리를 나눠 심거나 씨를 파종한다. 중국·소련·인도·일본에도 분포한다. 수련의 속명(屬名) 님파
이아(Nymphaea)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물의 여신 님프(Nymph)에서 유래되었다. 수련속(睡蓮
屬 Nymphaea) 식물은 열대지방과 온대지방에 40여 종(種)이 있는데, 한국에는 수련과 애기수련
(N. minima)이 서식한다. 이중 애기수련은 황해도 장산곶과 몽산포의 바닷가와 근처 늪에서 자
라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수련을 포함한 수련목(睡蓮目 Nymphaeales) 식물은 식물진화적으로 중요한 식물인데 쌍떡잎
식물로 분류되면서도 떡잎을 1장 가진다. 또한 안쪽에 있는 꽃잎일수록 수술의 모양을 갖추고 있
어 수술이 변하여 꽃잎이 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해준다. <다음 백과사전>
<▲ 연못 옆 화단의 과꽃>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어릴 때 시집 간 누나를 아련히 그리며 부르던 동요 속의 그 꽃.
<▲ 지장보살상에서 내려다 본 탑과 연못>
<▲ 지장보살입상>
화강암을 깎아 만든 5좌 높이의 좌대에 15자 높이로 조성된 지장보살.
대좌 둘레에는 심우도와 시왕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 삼천사 대웅보전 전경>
1999년 1차 중창불사를 마친 삼천사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산령각(山靈閣),
천태각(天台閣),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5층나한사리탑, 종형의 석가세존진신사
리탑, 중창비, 관음상(觀音像),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입구의 5층석탑, 3채의 요
사, 공양방, 수련원, 종무소로 이루어져 있다.
<▲ 삼천사 대웅광전 석가여래삼존불>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대웅보전은 상단에 석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뒤에는
영산회상도를 목각으로 새겨 봉안했다. 이어 십육나한을 비롯한 5백나한상을 뒤쪽벽에
안치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중단에는 104위를 모신 신중탱화를 조성했으며, 왼쪽에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다.
<▲ 대웅보전 뒤편의 석가세존진신사리탑>
종모양의 이 사리탑은 1988년 성운스님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타타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 正)으로부터 건네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하였다.
<▲ 삼천사 석불전/산령각 아래 병풍바위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보물 제657호|1979.05.22 지정>
삼천사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은 전체 높이가 3.02m, 불상의 높이만 2.6m가 된다.
고려 불상 중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는데, 머리 광배(光背)는 겹둥근 무늬로 민머리(素髮)에
상투 모양의 육계(肉?)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돋을새김을 한 얼굴에서는 온화하면서도 중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상체는 어깨가 벌어져 건장한 모습인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사이로는 내의와 바지의 띠매
듭이 드러나고 있다. 수인을 보면 오른손은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앞쪽으로 들어올린 본존불
에서 흔히 나타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옷은 양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통견의(通肩衣)로 신체에 비해 다소 두껍게 나타내고 있어서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발밑의 대좌는 연꽃잎이 위쪽으로 피어난 앙련의 연화좌(蓮花座)이며, 꽃잎
은 단판중엽이고 꽃잎사이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입상은 양각과 음각의 수법을 겸용한 특이한
조각이며 시각적인 도움을 주는 동시에 신앙의 발로인지 근년에 이르러 안면(顔面)을 제외한 윤곽에
금박을 칠했다.
<▲ 삼천사 산령각(山靈閣)>
<▲ 삼천사 산신>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995년에 개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각으로 된 산신탱화를 중심으로 좌우로 역시 목각으로 된 독성
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 등산로 옆 삼천사 일주문>
개울 건너편 바위 위에 있는 5층의 나한사리탑이 있다고 하는데 보지를 못하고 왔습니다.
다음에 들리면 꼭 보고 와야겠습니다.
석가세존진신사리탑에서 일주문으로 나오면 삼천사계곡 등산로이다. 의상능선으로 오를 수 있고
비봉능선으로도 갈 수도 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응봉능선을 올라 사모바위를 거쳐 승가사로 내려
가는 것이기에 되돌아 내려갑니다.
<▲ 삼천사 아래 삼거리 길 이정표>
응봉능선 끝나는 곳에 사모바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모바위까지는 2.8킬로.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가풀막이 시작되지만 쉬며쉬며 올라갑니다.
<▲ 응봉능선을 오르며 바라본 삼천사 전경>
<▲ 산령각과 마애여래불상/마치 새가 보금자리를 튼 듯 아늑하다>
<▲ 노간주나무 열매>일년생은 파랗고 이년이 돼야 까맣게 익는데 약에 쓴다고 한다.
<▲ 응봉능선을 오르며 처음으로 보이는 의상능선/왼쪽부터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이다>
<▲ 의상능선의 3형제 봉우리/용출봉,용혈봉,증취봉>용혈봉 내리막 길에 기도하는 할머니 바위가 점처럼 보인다.
<▲ 응봉능선> 저기를 넘어가야 하는데 운무로 시야가 뿌옇다.
<▲ 산초나무 열매>
오르면서 여러 그루를 만났다. 한 알씩 따서 으깨어 코에다 대니 산초열매
특유의 알싸한 향이 산행의 피로를 잊게 합니다.
<▲ 가파른 바윗길도 있고>
<▲ 쇠난간을 설치해 놓은 곳도 있다>
<▲ 쇠난간을 올라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능선이 개미허리 같다>
<▲ 의상능선과 우측 끝의 문수봉, 보현봉까지의 전경>
<▲ 당겨서 본 문수봉과 보현봉>
문수봉 최고봉 바위가 모자를 쓴 것 같고 문수봉의 명물인 두꺼비바위가 금방이라도
풀쩍 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비봉>시선을 오른쪽으로 멋진 봉우리 비봉이 보인다
<▲ 비봉아래 00 바위>산님들이 릿찌로 큰바위를 오르고 있다
<▲ 열매가 익으면 '팥' 처럼 빨갛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팥배나무 엶매>
<▲ 의상능선 너머 삼각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 비봉과 향로봉으로 펼쳐진 능선>
<▲ 당겨서 본 문수봉>
문수봉 제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있는 산님들의 모습이 성냥개비를 세워놓은 듯 합니다.
막 뛰려고 하는 두꺼비바위 옆에 연습바위도 조그맣게 보입니다.
<▲ 비봉능선의 승가봉>문수봉으로 향해 가는 산님들의 모습, 또는 비봉으로 가는 산님들.
<▲ 응봉능선의 전망대 바위>
응봉능선에 왜 갈까?
응봉능선의 매력은 좌측으로는 의상능선, 우측으로는 비봉능선의 조망이 압권입니다.
<▲ 괴상하게 생긴 이 물건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응봉능선의 산불감시탑>
<▲ 응봉능선 끝자락에서 바라본 비봉의 모습>
<▲ 응봉능선의 종착점 사모바위>
<▲ 응봉능선, 비봉능선 길목의 사모바위>여전히 산님들로 만원이다.
<사모바위>
응봉능선 방향에서 보면은 <사모관대> 모양이다. 사모관대(紗帽冠帶)는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옷이다.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었으며, 네모진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
였다.
허리띠는 조복의 대와 같고 흰색 버선에 협금화를 신었다. 지금은 결혼식 폐백을 드릴 때나 전통
혼례를 할 때 신랑이 입는다. <다음 백과사전>
1.21 사태때 김신조 일행이 이 곳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청와대 습격을 노렸다 하여 김신조
바위라고도 불리는데 비봉에서 문수봉 가는 길목 300미터 지점에 있는데 사모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청년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사모바위에서 만난 기름나물>
<▲ 사모바위 아래서 만난 뚝깔>
<▲ 쑥/사모바위에서>
<▲ 사모바위 삼거리 이정표>
삼천사로 내려가는 응봉능선, 대남문으로 이어지는 문수봉, 향로봉의 삼거리 길입니다.
<▲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비봉>
<▲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비봉>
비봉 꼭대기에 진흥왕순수비가 보이고 오늘따라 산님들이 더욱 많아 당겨 보았더니
와! 정말로 많이들 올라가 있습니다.
<▲ 사모바위에서 찍은 사진>
<▲ 사모바위에서>
하산 : 승가사→구기탐방지원센터
<▲ 사모바위와 비봉 사이의 이정표>승가사까지는 400미터. 승가사로 가기 위해 하산을 한다.
<▲ 승가사 연혁과 일주문>
서울종로 승가사 연혁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했으며 당 고종연간(高宗年間:649~683) 연간에 장안(長安)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며 생불(生佛)이라고 칭송되었던 승가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절이름을 승
가사라 했다고 한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고, 1090년(선종 7)에는 영현(領賢)이
중수했다.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
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고종 때 민비와 엄상
궁의 시주로 일부 당우가 다시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57년 도명(道明)이
대웅전·영산전·약사전을 중창했으며, 그뒤를 이어 상륜(相侖)이 불사를 계속하여 산신각·동
종각·대방·요사채 등이 있다. 승가굴 안에는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僧伽寺石造僧伽大師像:
보물 제1000호)이 있다.
삼각산 승가사는 진흥왕 순수비로 유명한 비봉과 사모바위(일명 김신조바위)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승가대사를 봉안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승가대사는 서역인으로서 서기 640년에 출생하여 당나라로 건너와 53년간 불교 전교에
헌신한 분으로 갖가지 변화를 자유자재로 하여 기적을 나타내어 동방의 불교 홍법에 큰
획을 이루어 관음보살로 회신되어 중국의 각지에 승가당이 설치되어 있다.
<▲ 9층 석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 계단을 오르면 바로 9층 석탑이 마중을 한다>
<▲ 승가사 민족통일호국보탑공덕비>
<▲ 9층석탑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 공양 올리는 문수보살상>
<▲ 9층석탑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 대웅전으로 올라가며 바라본 9층석탑>
<▲ 승가사 포대화상>
포대화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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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가사 포대화상>
이곳의 '포대화상'은 도선사의 포대화상과 일선사의 포대화상과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배가 불룩 나오고 후덕한 인상의 모습은 같지만 걸망을 매고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는
일화처럼 아이들이 천연스럽게 매달리는 익살스러운 모습이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포대화상>
<▲ 승가사 십이지신상/쥐>
1) 쥐[子]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쥐에 대한 관념은 다양하게 나타난다.'영리하다' '재빠르다' '머리가 좋다'라는
일반적인 관념 외에 어떤 재앙이나 농사의 풍흉, 뱃길의 사고를 예견해 주는 영물로 인식하기도 했으며
이와 상반되게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동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구차하고 하찮은 존재를 비유하는 의미로 쓰였다. 쥐는 때때로 고양이와는 대조적으로 약자를 대
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약자는 영리하며 천성이 착하나 구차하게 가난하다.
강자는 무식하고 덩치가 크고 많은 재력을 소유하고 있다.여기서 쥐의 이미지는 약자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민담 속에서 은혜를 갚은 쥐나 사람의 출세를 도운 쥐이야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쥐이야기 등은 이
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쥐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신성성(神聖性)과 예지성(豫知性) : 무덤의 수호신, 사금갑조, 상자일의 근신, 뱃길의 안전과 농사의 풍흉
을 결정하는 마을 수호신(해안도서 지방), 서도신사(鼠島神祠), 물과 불의 근원을 알려준 영물, 고대 아테네
신전에서는 쥐에게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② 다산성(多産性) : 쥐는 생물학적으로 왕성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복장을 지키는 동물, 쥐띠가 밤에 태어나면 좋다.
③ 근면함(勤勉)과 재물(財物)·부(富)의 상징 : 쥐는 어느 곳이나 민첩하게 드나들 수 있는 강한 활동력을 가지
고 있다. 상자일 풍속이나 쥐불놀이, 쥐와 관련된 주문이나 풍속에서 풍작 기원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쥐
또는 아들의 뜻을 가진 子는 '계속하다, 작다, 불어나다'라는 핵심적인 뜻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쥐
의 활동력을 비유해서 집안에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집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일을 '쥐바람쐬기'라고도 부른다.
쥐의 민첩성은 자연스럽게 근면성을 연상시켰고, 이렇게 연관된 개념으로 쥐가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쥐가 근면과 부의 상징이라는 인식은 속담뿐만 아니라 여러 민담을 통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혼
쥐이야기'다. 근면함이 결국은 부(富)라는 행운의 열쇠가 되었다는 인식이다.
④ 지혜의 정보체와 현명함 : 물과 불의 기원을 미륵에게 가르쳐 주었는가 하면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많
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 정보체로서 역할을 해 왔다. '황금구슬찾기' 등 민담 속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영리한 동물
로 묘사된다. 또한 속담에는 약삭빠르고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을 가리켜 '약기는 생쥐' '얼굴에 생쥐가 오르락내
리락한다' 라고 표현했다.
⑤ 귀여움 : 새앙쥐는 귀엽고 현명함의 상징으로, 세익스피어나 메어 등의 작품에서 표현되었다. 또 이솝우화 등
에서는 영리하고 약한 자의 긍정적 이미지를 가진다. 최근 쥐는 동요, 동화, 만화(미키마우스, 톰과 제리)의 주인
공으로도 등장하여 오히려 고양이를 괴롭힌다.
쥐는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어 왔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한 동물로 배척 당하기도 했다.
① 부정함 : 쥐가 손톱, 발톱을 먹고 그 주인으로 변신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요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로부터 곡간에 쌓아 둔 곡식들을 훔쳐 가지고 땀흘려 농사 지은 곡식을 망쳐 놓았다. 농사가 생활의 중심이던
조상들은 쥐의 피해를 많이 겪었고 그렇기 때문에 쥐는 농사일을 망치는 해악을 가져오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상자일, 쥐불놀이 등에서 쥐를 퇴치하는 다양한 풍속이 전해진다.
② 작고 왜소하고 하찮음 : 우리 속담에서 쥐는 하찮은 것, 왜소한 것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것이 많다.
③ 도둑·탐욕 : 쥐가 가지는 근면성이 부정적인 면으로 여겨지면 근면성은 탐욕의 이미지로 바뀌어 진다. 쥐는 간신,
수탈자, 부도덕으로 관념화되었다.
④ 야행성·재앙 : 쥐가 병을 옮긴다.
⑤ 정적 : '쥐죽은듯하다'라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이 쥐가 소리내지 않고 다니는 동물이라는 데서 쥐는 정적의
표상이 된다.
쥐에 대한 관념을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분법적 결론으로 도출해 내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한국 문화 속에 쥐에
대한 관념은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조상들은 각 띠동물에
대한 관념과 상징을 각기 독특하게 부여하고 해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소>
2) 소[丑]
농경 사회인 우리 민족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일하는 짐승으로 부와 재산, 힘을 상징한다. 소를 위하는 세시
풍속과 놀이에서도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동물로, 농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농사의 주역으로 풍부한 노
동력, 힘을 의미한다.
제주도 삼성혈 신화, 고구려 고분 벽화 등에서는 소가 농사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새해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에는 한 해 동안 고된 농사일에 대한 위로와 풍년을 가져오게 한데 대한 감사로 소에 대한 각종 풍속과 민
속놀이가 행해졌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라는 속신어나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
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는 풍수지리설 등을 통해서 볼 때 분명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고대 사회부터 소는 주로 제천의식의 제의용이나 순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풍습은 고려, 조선까지
이어져 풍년을 기원하는 의례에서 소를 제물로 바쳤다.
장사하는 집이나 일반 여염집 대문에 소고삐나 소뼈를 걸어 두고 악귀의 침입을 막았다. 외양간에도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렇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소를 바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소의 기운을 누리게 하도록 하기 위해 소의
희생을 바치는데 그 희생의 힘으로도 나쁜 악귀를 물리치는 축귀의 힘이 있었다고 믿었다. 국가의 큰 제사나 의례
때, 마을의 별신굿이나 장승제에서 소가 희생의 제물로 쓰였고, 소뼈, 소고삐 등은 잡귀를 쫓는 부적이었다. 소는 부
를 불러오고 화를 막아주는 존재였다.
소의 성격은 순박하고 근면하고 우직하고 충직하다. '소같이 일한다''소같이 벌어서''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이라
는 말은 꾸준히 일하는 소의 근면성을 칭찬한 말로서 근면함을 들어 인간에게 성실함을 일깨워 주는 속담이다. 소는
비록 느리지만 인내력과 성실성이 돋보이는 근면한 동물이다. '소에게 한 말은 안나도 아내에게 한 말은 난다'는 소
의 신중함을 들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
은 《삼강행실도》의 의우도, 의우총 이야기나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우답동
이야기에서는 소의 우직하고 충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는 비록 느리지만 근면함과 묵묵함은 유유자적의 여유와 한가로운 대인(大人), 은자(隱者)의 마음이라는 이미지를
수반한다. 소의 모습에는 긴장감이나 성급함을 찾아볼 수 없으며, 순박한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롭고 자적한
느낌을 갖게 한다.
평화스럽게 누워 있는 소의 모습,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에게 젖을 빨리는 광경은 한국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
으로서 소가 창출해 내는 분위기는 유유자적의 여유, 한가함, 평화로움의 정서이다.
한국 문화에 나타난 소의 모습은 고집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풍요, 부, 길조, 의로움, 자애, 여유 등으로 축약된다.
① 농사신으로서 부·풍요·힘의 상징
② 희생·제물·축귀의 상징
③ 순박·근면·우직·충직의 상징
④ 유유자적의 여유·한가함·평화로움의 상징
⑤ 고집·어리석음·아둔함의 대명사
<▲ 십이지신상/호랑이>
3) 범[寅]
① 신화 : 단군신화(조급, 패배)의 범은 곰과 함께 사람이 되고자 원했으나, 조급하여 금기를 지키지 못해 실패했다.
고려 태조의 5대조 '호경이야기'에서 범은 영웅들의 보호자이자 양육자이며 국조(國祖)의 조력자이다.
② 무속(산신, 산신의 심부름꾼) : 범 숭배 신앙은 산악 숭배 사상과 융합되어 범이 산신 또는 산신의 사자를 상징한다.
각 지역에서 신봉하는 산신을 모신 산신당의 산신도에는 범이 그려져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신수(神獸)로 인식되었다.
그런가 하면 영일 강사리 범굿에서는 범에게 물려 죽은 넋을 위로하고, 호환을 방지하기 위해 쇠머리를 뒷산에 묻는 의
식을 치른다.
③ 벽사 : 병귀나 사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범그림, 범호자 부적).
④ 권세 관직 군대의 상징 : 호랑이의 용맹성은 군대를 상징한다(백호, 맹호 부대)
⑤ 보은 : 호랑이는 인간의 효행에 감동하여 인간을 돕거나 인간의 도움을 받으면 은혜를 갚는다. 불교의 산신각 호랑이
는 산신의 사자나 산신으로 모셔져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고 있다.
⑥ 까치 호랑이 그림 : 가장 흔한 호랑이 그림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다. 여기서 소나무는 장수를, 까치는 기쁨을, 범은 보
은을 상징한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토끼>
4) 토끼[卯]
① 문화 영웅적 속임수의 명수 : 호랑이를 속이는 토끼, 자라를 속이는 이야기에서 토끼는 체구가 크고 힘은 강하나
우둔한 동물들에게 저항하는 의롭고, 꾀 많은 동물 구실을 도맡아 한다.
② 달 = 여성 = 토끼 : 달의 이칭은 토월(兎月)인데, 달 속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달의 이지
러짐과 만월의 주기는 여성의 생리 현상과 동일하다. 달의 차가움이 음(陰)과의 관계 등으로 연상되어 토끼는 여성 원
리에 속하는 동물이다.
③ 꾀쟁이[智者], 재빠름, 소심함(놀란 토끼) : 일반적으로 토끼는 꾀보 꾀쟁이 재빠름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놀란
토끼 같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토끼의 소심함과 경망함, 겁쟁이를 이르기도 한다.
④ 충성 불로장생 : 토끼는 민첩한 특성 때문에 심부름꾼이나 전령 등의 역할을 자주 맡는다. 이러한 역할은 유교적인
측면에서 충성스러운 동물로 나타난다. 민간 설화에서 옥토끼는 달에 살면서 떡을 찧거나 불사약을 만들고 있는 것으
로 전해진다. 그래서 토끼는 도교적으로 장생불사를 표상한다.
⑤ 속신 : 언청이(임산부가 토끼고기를 먹으면 언청이를 낳는다) 상묘일(토끼날 여자가 남의 집 여자나 나무그릇을 집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⑥ 유물·유적 그림 : 뒷다리가 튼튼해 잘 뛰므로 나쁜 기운으로부터 잘 달아 날 수 있고, 윗입술이 갈라져 여음(女陰)을
나타내니 다산을 할 것이고, 털빛이 희니 백옥 같은 선녀의 아름다움이 있다(벽사 다산 아름다움).
불로장생 약을 찧고 있는 토끼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뚜꺼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이들은 달의 정령(精靈)
이다. 고려청자투각칠보향로는 둥근 달을 칠보문으로 투각하고 연꽃으로 받친 향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받침 다리를
토끼로 만든 것은 '토끼 같은 자식새끼'라는 말처럼 부부애와 자손의 기원을 나타낸다. 조선 시대 민화에서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찧는 토끼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방아찧기로 부부애를 은유한 것이다.
⑦ 각국의 풍속 : 달 장생불사 민첩(중국), 영리함 교활함(일본)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용>
5) 용[辰]
① 물의 신 : 용은 못이나 강, 바다와 같은 물 속에 살며, 비나 바람을 일으키거나 몰고 다닌다고 여겨져 왔다. 용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용은 물의 신이면서 우사의 성격도 지닌다.
② 시조의 어버이 : 신화 속의 수신인 용과 혼인을 통해 국조(國祖), 군주, 씨족조(氏族祖) 등 귀인의 어버이로 나타난다.
석탈해는 용성국 왕과 적녀국 왕녀 간의 소생이고, 고려 태조 왕건은 작제건과 용녀의 소행인 용건의 아들이다. 백제 무
왕인 서동은 어머니가 과부로 서울 남지변에 살던 중에 그 연못의 지룡과 교통하여 출생하였고, 후백제 시조 견훤은 광주
북촌의 부잣집 딸이 구렁이와 교혼하여 낳았다고 한다.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은 용의 후예라고 하는 씨족의 시조 신화
로서 나타난다.
③ 호국 호법의 신 : 용은 수신으로 호법신 또는 호국신의 역할을 한다. 삼국유사에 많은 이야기가 있다.
④ 제왕(임금) 왕권 : 천후(天候)를 다스림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농경 문화권에서 군왕과 용은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그래서 군왕과 관련되는 사물이나 비범한 인물에게까지 용은 상징적으로 작용한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 임금의 평상은
용상, 임금의 옷은 곤룡포, 임금의 즉위는 용비(龍飛)로 나타낸 것이 그것이다.
⑤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대상 : 용은 민간신앙에서 비를 가져오는 우사이고, 물을 관장하는 수신이며,
사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의 착한 신이다. 농경 민족인 우리에게 물은 생명처럼 소중하므로 가뭄이 심할
때에는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어로를 생업으로 삼는 어촌에서는 용왕굿이나 용왕제를 지내며 배의 무사와 풍어, 마
을의 평안 등을 기원한다.
⑥ 천지조화 상서 풍운조화 : 용은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용은 뭇 동물이 가진 최상의 무기를 갖추고 있으며, 구름과 비를 만들고, 땅과 하늘에서 자유로
이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믿어져 왔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지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
을 수 있을 만큼 커질 수 있으며,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용은 대체로, 짙은 안개
와 비를 동반하면서 구름에 쌓여 움직인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뱀>
6) 뱀(巳)
[과학모형 (科學模型)]
1. 형상(形狀)
① 몸이 가늘고 길다
② 비늘로 싸여 있다.
③ 몸의 이동은 네다리가 없기 때문에 몸을 구부려 곡선의 정점에 힘을 주어 끌어 당겨 구불구불하게 진행 한다.
2. 눈 혀 귀 코
① 눈까풀이 없고 가까운 것을 잘 본다.
② 혀가 가늘고 두가닥으로 갈라져 있다. 미각은 없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냄새로서 먹이를 탐지하려는 것이다.
③ 귀는 퇴화되어 겉귀가 전혀 없으며 가운데 귀도 1개 의 뼈만 있어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지면을 통한 진동 에는 매
우 민감하다.
④ 후각이 발달함
3. 독(毒) 식성(食性)
① 독니[毒牙]가 있다(신경에 작용하는 것, 혈액이나 국부조직을 파괴하는 것, 복합적인 것)
② 곤충이나 척추동물을 먹는다 (이빨, 독, 목으로 감아서).
4. 허물
① 뱀의 몸은 비늘로 싸여 있지만 이들 비늘은 1개씩 떨어지지 않는 연결된 피부로 되어 있다.
② 표피의 바깥 층이 오래되면 눈의 부분까지 포함하여 표피 전부를 뒤집어 허물 갈이를 한다.
5. 동면
① 추울 때 동면하고 따뜻할 때 활동한다.
② 겨울 동안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봄에 다시 살아 난다.
6. 다산성
① 난생 난태생으로 한 번에 100여 마리씩 부화한다.
② 수컷은 주머니 모양의 생식기가 2개 있다.
[민속모형 (民俗模型)]
1. 형상(形狀)
① 상사일에 긴 물건(실, 머리카락, 밧줄, 새끼)을 만지지 않는다.
② 상사일에 '巳不遠行': 멀리 가지 않는다(蛇足).
③ 정월 보름 뱀과 비슷한 형상(썩은 새끼, 진대)을 만들어 뱀치기, 배지지, 진대끌기 등을 한다.
④ 징그럽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 사악하다
2. 눈 혀 귀 코
① 날카롭다. 차갑다. 매섭다.
② 유혹, 여자, 말조심
③ 지혜롭고 상황판단을 잘하는 동물로 인식
3. 독(毒) 식성(食性)
① 날카롭다.
② 무섭다. 두렵다.
③ 뱀에 손가락질 하거나 맨발로 밟으면 썩는다.
4.허물
① 변신(뱀서방 이야기, 인간의 원혼이 뱀으로 변신)
② 민간 의료의 약재[巳脫皮]
③ 자기 혁신의 본보기[뱀허물 벗기]
5.동면
① 재생(무덤 속의 벽화, 토우로 넣음)
② 지신(地神)
③ 사자(死者)의 영혼
④ 끈질긴 생명력(일시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죽였을 때 다시 살아나 반드시 복수한다)
⑤ 악업(惡業)
6.다산성
① 양기[陽氣:지구력과 정기]
② 생산신[多産神] → 재신[財神;업신]
③ 민간의료[생식, 탕, 술]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말>
7) 말(午)
말은 십이지의 일곱 번째 동물로서 시각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방위로는 남, 달[月]로는 음력 오월에 해당한다.
말의 이미지는 박력과 생동감으로 수렴된다. 외모로 보아 말은 싱싱한 생동감, 뛰어난 순발력, 탄력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를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말은 고래로 원시 미술,
고분 미술, 토기, 토우, 벽화 등에 나타나고, 설화, 속담, 시가 등의 구비되는 이야기, 민속 신앙, 연희 등 민속 문화에 다
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사기》의 기록으로 기원전 위만조선에도 말의 수가 상당했고, 기마(騎馬)의 습속, 말이 전투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삼국지》동이전의 기록으로 보면 부여에는 명마(名馬)와 과하마(果下馬)라는 두 종류의 말이 있었고, 예나 부여에
서는 말을 재산으로 간주했고, 동옥저에는 말의 수가 적었다는 사실, 삼한 지역은 모두 우마가 있었으나 마한은 말을 타지
못한 반면에 변한, 진한은 말을 탔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말 모양 부적이 영천 어은동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3cm로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는 먼 옛날
부터 말을 액막이와 행운을 부르는 상징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날개 달린 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부적을 퇴액진복
부(退厄進福符), 신마부(神馬符)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위의 상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신라, 가야에는 말 그림, 말 모양의 고분 출토 유물이 발견되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각종 말 그림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
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영매자로서 피장자의 영혼이 타고 저 세상으로 가는 동물로 이해된다. 말이 그려진 토기, 토우, 벽
화는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지 몰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장(意匠)과 사상은 다 같은 것이다. 즉 피장자의 영혼
이 말을 타고 저 세상으로 가도록 드리는 공헌적 부장(供獻的 副葬)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비 설화나 문헌 설화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 하늘의 사신, 중요 인물의 탄생을 알리고 알아 볼 줄 아는 영물 또는 신모
(神母)이며,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구실을 한다. 특히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말은 모두 신령스러운
동물로 되어 있다. 금와왕, 혁거세, 주몽 등 국조(國祖)가 태어날 때 서상(瑞祥)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든지, 백제가 망할
때 말이 나타나 흉조를 예시해 준다든지 모두 신이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혁거세신화와 천마도의 백마(白馬)는 최고 지위의 거주(居住)인 조상신이 타는 말로 인식되었고,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대
소설, 시조, 민요 등에서는 신랑 소년 애인 선구자 장수 등이 타고 오는 동물이 되었다. 세시 풍속에서는 말을 육축(六畜)의
하나로 인식하고, 정월 상오일, 시월 말날에 특별히 말을 위해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오늘날까지 일부 지역의 동제
당에 마상(馬像)이나, 마도(馬圖)가 마을 수호신으로, 혹은 동신이 타고 다니는 승용 동물로 모셔지고 있다.
동제당에 봉안된 말은 마을 수호신인 동신이 타고 다니라고 봉안하는 경우,호환(虎患)과 관련되어 호환을 퇴치하기 위해서
봉안되는 경우, 솥공장이나 옹기 공장이 잘되도록 기원하기 위한 제물로 봉안하는 경우, 말에 대한 순수한 숭배 관념에서
봉안되는 경우 등이 있다.
민속놀이에서도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격구, 마상제, 윷놀이 등이 그 예이다. 일상생활에서의 말의 이용은 단순히 실용 혹
은 수렵 및 간단한 경제적 단계에서 정복과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이용 단계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전 역
사를 통해 말은 농경, 수공업의 원료, 군마, 교통 통신의 역마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근자에는 제주도 일부와 민속촌
관광지와 경마장을 제외하고는 말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실제 말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중층 되면서
형성되어 온 말의 이미지와 관념은 또다른 형태, 즉 현대 기업 상표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말에 대한 표현 양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헌, 유물, 설화, 신앙, 놀이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어느 정도 변화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
어, 신성한 존재, 하늘의 사신, 중요 인물의 탄생을 알리고 알아볼 줄 아는 영물 예언자적 존재, 죽은 사람의 영혼과 마을 수호
신이 타는 동물, 장수 신랑 선구자 등 희망을 가져다주는 인물들이 타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양>
8) 양(未)
양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는 순하고 어질고 착하며 참을성 있는 동물,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은혜를 아는 동물로
수렴된다.
양하면 곧 평화를 연상하듯 성격이 순박하고 온화하여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다.
양은 무리를 지어 군집 생활을 하면서도 동료간의 우위 다툼이나 암컷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갖지 않는다. 또한 반
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습성도 있다.
성격이 부드러워서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으나 일단 성이 나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목양(牧羊)이 깊이
토착화되지 못한 우리 나라에서는 양과 관련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한(三韓)시대에 양을 식용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고, 일본의《日本書紀》에 기록에 보면
"법왕(法王) 1년(599년) 7월에 백제에서 낙타 한마리, 나귀 한마리, 양 두마리, 흰꿩 한마리를, 헌덕왕(憲德王) 12년
(820년)에는 신라에서 검은 수양 두마리, 흰양 네마리, 산양 두마리, 거위 한 마리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들 내
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나라에 흔하지 않던 양이 삼한 시대부터 국가간 외교에서 중요한 공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해 들어 첫 양날을 상미일(上未日)이라고 한다. 첫 양날에 특기할 만한 민속은 찾기 힘드나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양
이 방정맞고 경솔하여 해안 지방에서는 이날 출항을 삼가는 곳도 있다. 경거망동하면 바다에 나가 해난을 만난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환자라도 약을 먹지 않는다. 이날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제외하고는 양은 온순한 짐승이기 때문에 이날 무슨 일을 해도 해가 없다고 한다. 우리
가 정월에 하는 윷놀이의 도개걸윷모에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이 바로 양에 해당한다.
천성이 약한 탓에(착한 탓에) 해로움을 끼칠 줄도 모르면서 오직 쫓기고 희생되어야 하는 양은 설화, 꿈, 속담 등에서도
언제나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통한다.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에 양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놀라 꿈을
깨었다. 이 꿈 이야기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하리라는 해몽을 했다.
즉 한자의 '羊'에서 양의 뿔에 해당하는 ' '획과 양의 꼬리에 해당하는 곤 '?'획을 떼고 나면 "王"자만 남게 되어 곧 임금
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매 양꿈은 길몽으로 해석되었다. 지금까지도 양꿈에 대한 해
몽은 희생, 제물, 종교인, 선량한 사람 등으로 해석한다. 이런 연유는 목축 민족에게는 양이 재산의 척도가 되고, 제단
에 바치는 희생물이었고 양의 성품이 티없이 온순해 착한 사람으로 의미하게 되고, 기독교 문화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양과 관련하여 종교인의 상징이 된다.
우리 민족은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하지 않는다. 염소의 수컷에는 턱수염이 있다. 수염이라는 것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
게만 있는 것이고, 염소의 성격이 또한 온화하고 온순하여 옛날이야기나 동화 속에서 염소는 주로 인심 좋은 할아버지
로 묘사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양이 늑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잡아먹히는 대상이 대거나, 이들 동물과 대조를 이
루어 착한 동물로 이야기된다.
양은 언제나 희생의 상징이었다. 양의 가장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속죄양(贖罪羊) 일 것이다. 성격이 순박하여
양하면 평화를 연상한다. 겁먹은 듯한 순한 눈망울과 복슬복슬한 털에 덮인 양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평화와 안락의
상징으로 충분하다.
양은 또한 정직과 정의의 상징이었다. 양은 반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정직성이 있다. 우리 속담에 '양띠는
부자가 못된다'라는 말이 있다. 양띠 사람은 양처럼 너무 정직하고 정의로워서 부정을 못보고, 너무 맑아서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유교 : 음력 봄 2월과 가을 8월의 첫 丁日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인 석전대제에서 조(俎;도마) 위에 담는 희생
으로 양머리[羊腥]를 사용한다. 양머리는 유교의 대표적인 희생물이다. 동양에서 양은 일찍부터 영험스러운 동물[靈獸]로
알려졌다. 소, 돼지와 함께 제물로 쓰여왔고 고기의 맛이나 질도 그만큼 좋은 상위권의 동물이었다.
고대 동양에서는 소는 소의 솥[牛鼎], 돼지는 돼지의 솥[豕鼎], 양은 양의 솥[羊鼎]에 각각 삶아서 제물(희생)로 썼으며,
각 솥은 독특한 장식이 있었다. 양을 중히 여기는 생각은 세월에 따라 聖獸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렸으며 먹고 버린 뼈까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시하는 영물로 간주되었고 고이고이 간직하기도 했다.양의 가죽 옷은 제후나 대부 등 높은 신분에 있
는 사람만 입을 수 있는데 논어의 이른바 염소 가죽옷에 검은 관을 썼다는 '羔裳玄冠'이 바로 그것이다.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은혜를 아는 동물로, 늙은 아비양에게 젖을 빨리며 노후를 봉양하는 양의 모습에서 효를 상징하기도 한다.
상형 문자인 양(羊)이 생기게 되자, 羊은 인간의 모든 기쁨을 포괄하는 글자가 되어 '좋은 것' 또는 '상서로운 것'을 나타
내게 되었다.
양의 생김새에서 딴 상형 문자인 양(羊)은 맛있음, 아름다움[美], 상서로움[祥], 착함[善] 등의 의미로 이어진다. 즉 큰양
[大羊]이란 두 글자가 붙어서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자가 되고, 나[我]의 좋은 점[羊]이 옳을 의[義] 자가 된다. 양이란
상형문자에서도 착하고[善], 의롭고[義], 아름다움[美]을 상징하는 동물로 양을 인식했던 것이다.
'크게 좋고 상서롭다'는 것을 요즘처럼 '大吉祥'이라 쓰지 않고 '大吉羊'이라 썼으며, '모든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의 '壁除不祥'을 '壁除不羊'으로 썼던 기록이 《博古圖漢十二辰鑑》이나 《漢元嘉刀銘》 등에 남아 있다.
양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동물이다. 초원 위에 흰 구름의 형상을 수놓으며 몰려가는 양떼의 풍경은 가장 서
양적인 전원의 목가를 낳았고,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받쳐 온 성경에서 양이야기는 무려 500번 이상이나 인용된다. 고대
이스라엘인의 생활에서 양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의(祭儀)의 필수품이었고, 양의 머릿수가 곧 재산을 뜻했다. 또한
양고기는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에게 인도했다는 것도 양의
상징적 기능을 말해 준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이스라엘이나 서양에서 양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가 없
어진 것은 예수와 양이 동일시된 성서의 유산이다.
이처럼 기독교 문화에서 양은 선량한 사람이나 성직자를 상징해 왔으며, 일상생활에서 소나 말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
고 있었다. 일찍이 고대의 수메르인이나 이집트인들을 비롯 그리스, 로마, 게르만 민족도 양을 신의 신성수(神聖獸)로 생
각했으며, 유목민족에게 양은 특히 뇌우(雷雨)의 신이 가장 좋아하는 제사용 동물로 여겨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양은 미
래를 점치는 동물로 활용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양을 가리켜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고자 태어난 동물로서 높은 경지의 도덕성과 생생한 진실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양피(羊皮)는 고급 피혁으로 장갑, 구두, 잠바, 책표지 등에 쓰이고 양모(羊毛)는 보온력이 높고
질겨 고급 양복지, 솜 대용으로 두루 쓰이는 모직물의 주원료가 된다. 양유(羊乳)는 우유에 비해 단백질, 지방, 회분이 풍부
해 허약 체질인 사람에게 좋다. 이처럼 양은 털, 고기, 뼈 등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일상생활에 이용되는 유익한 동물이
다.
회화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의 {二羊}과 작자 미상의 {山羊} 그림이 있고 도자기로는 원주 법천리고분서 출토된 '靑瓷羊'
등이 있다. 우리의 옛 조각이나 그림에서 양을 그린 작품은 드물다. 그러나 일단 우리 앞에 나타난 양의 모습은 위기를 만
나도 당황하지 않은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하는 평화와 정의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원숭이>
9) 잔나비[申]
원숭이는 동물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재주 있는 동물로 꼽히지만, 너무 사람을 많이 닮은 모습, 간사스러운 흉내 등으로
오히려 '재수 없는 동물'로 기피한다. 띠를 말할 때 '원숭이띠'라고 말하기보다는 '잔나비띠'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등장하는 12지신상의 원숭이는 무덤의 호석이나 탑상(塔像), 부도(浮稻), 불구(佛具) 등에서, 머리는
원숭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몸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무기를 손에 잡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원숭이(申)는 시각으로는 오후 2시에서 5시, 방향으로는 서남서를 담당하는 시간신(時間神)이며 방위신
(方位神)으로, 이 시간과 이 방향으로 들어오는 사기(邪氣)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청자와 백자에서도 원숭이의 생생한 모습이 보인다. 인장의 꼭지, 연적, 수적, 서체(緖締), 작은 항아리, 걸상 등에서 그
릇의 모양이 원숭이의 형상을 띠고 있거나 장식 문양으로 원숭이가 나온다. 청자나 청동으로 만든 원숭이꼭지도장[猿形
印章]은 쭈그리고 앉거나, 긴 손으로 얼굴을 만지고, 혹은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를 하
고 있다.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 동물로 갖가지 만능의 재주꾼이기도 하지만, 부모 자식간의 극진한 사랑이나 부부
지간의 애정은 사람을 뺨칠 정도로 셈세한 동물이라고 한다. 원숭이의 이러한 母子 간의 지극한 유대의 정을 표현한 청자
원형모자상(靑磁猿形母子像)은 연적(硯滴)이나 서체(緖締), 장식품 등에서 어미가 새끼를 고이 품안에 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백자 항아리에서는 원숭이가 부귀 다산을 의미하는 탐스런 포도 알을 따먹거나 포도 가지 사이로 다니는 모
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부귀 다산의 의미를 지닌 포도 알을 따먹은 원숭이는 바로 부귀 다산의 상징이요 그
기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그 주제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십장생들과 등장하면서 천도를 들고 있는 장수의
상징인 원숭이, 불교 설화나 서유기와 관련하여 스님을 보좌하는 원숭이, 숲 속에서 사는 자연 상태의 원숭이 등이 그것
이다.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거나 먹고 있는 원숭이는 그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천도복숭아는 열매를 한 번 맺는데
3000년이 걸리고, 그 열매가 익는데 다시 3000년이 걸리는 나무로 장수의 상징이다. 이런 천도를 먹거나 손에 잡고 있는
원숭이도 바로 장수의 상징이며 기원으로써 그려진 것이다.
구비 전승에서는 꾀 많은, 재주 있는, 흉내 잘 내는 장난꾸러기로 자기의 잔재주와 잔꾀를 너무 믿어 제 발등 찍는 이야기
가 많다. 원숭이는 실제로 우리 나라에 없는 동물이지만, 십이지신상이나 청자, 백자, 회화 등에 나타난 원숭이는 우리 나
라에 실존하는 어느 동물보다도 그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고 그것을 통하여 원숭이가 지닌 여러 가지 상징성 암시성 등을
나타내려고 했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닭>
10) 닭[酉]
양우리 풍속에서는 닭이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로 여겨져왔다. 새벽을 알리는 우렁찬 닭의 울음소리, 그것은 한
시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서곡으로 받아들여졌다.
닭이 주력(呪力)을 갖는다는 전통적 신앙도 그 여명을 하는 주력(呪力)때문일 것이다. 밤에 횡행하던 귀신이나 요괴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일시에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민간신앙에서는 믿고 있었다. 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을 지녔
다고 흔히 칭송된다.
즉 닭의 벼슬(冠)은 문(文)을, 발톱은 무(武)를 나타내며 적을 앞에 두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용(勇)이며, 먹이를 보고
꼭꼭거려 무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 때를 맞추어 울어서 새벽을 알림은 신(信)이라 했다.
닭이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의 상징적 존재로서 나타나게 된 것은 삼국유사에서 혁거세와 김알지의 신라 건국 신화에
서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알영이나 김알지 같은 나라 임금이나 왕후가 나타날 때 서조(瑞兆)를 미리 보여주
는 길조(吉鳥)로 표현이 되었다.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천마총의 달걀 껍질이나 지산동고분의 닭뼈, 백제 고배 속의 달걀 껍질에서 알 수 있듯이 닭은
일찍부터 중요한 제물이 되었다. 천마총을 발굴했을 때, 단지 안에 수십 개의 계란이 들어 있었고 또 신라의 여러 고
분에서 닭뼈가 발견된다. 능속에 계란과 닭뼈가 들어 있었던 것은 저 세상에 가서 먹으라는 부장 식량일 수도 있고,
알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이 재생, 부활의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닭은 울음으로써 새벽을 알리는,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존재이다. 닭은 여명, 빛의 도래를 예고하기에 태양의 새이다.
닭의 울음은 때를 알려주는 시보의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지의 능력이 있기도 하다. 장
탉이 홰를 길게 세번 이상 치고 꼬리를 흔들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들이 되돌아가고, 잡귀들의 모습을 감춘다고 믿어
왔다.
닭은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에서 손(巽)에 해당하고, 손의 방위는 남동쪽으로, 여명(黎明)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상서로운 동물, 신비로운 영물로 간주한다. 닭이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생활하는
존재 양상의 이중성은 어둠과 밝음을 경계하는 새벽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계가 없던 시절의 밤이나 흐린 날에
는 닭의 울음소리로 시각을 알았다. 특히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면,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뫼를 짓고 제사를
거행했다. 수탉은 정확한 시간에 울었으므로, 그 울음소리를 듣고 밤이 깊었는지 날이 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제때에 울지 않거나, 울 시각이 아닌데 닭이 울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초저녁에 닭이 울면 재수가
없고, 오밤중에 울면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해진 뒤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속담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암탉이 울어 날샌 일 없다"라는 속담이나 "암탉이 울어서 날샌 일 없고, 장탉이 울어서 날 안 새
는 일 없다"는 속담은 암탉을 여자에 비유하여 잘못된 닭 울음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닭은 동이 틀 때 횃돼에 올라가 새날이 옴을 예고하고, 밤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닭 울음소리와 함께 새벽이
오고 어둠이 끝나며, 밤을 지배하던 마귀나 유령도 물러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러 풍속에서 보면 닭소리를 귀신
이 무서워한다고 여기고 있다. 닭 울음소리는 빛의 전령으로 태양을 부르고 사람을 기동하게 하는 것으로 밤중에 횡행
하던 도깨비 같은 귀신들은 그 소리만 들으면 자취를 감춘다. 닭은 새벽을 고하고 새벽은 빛으로서 악정령(惡精靈)을
쫓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은 인간에게 질병과 재앙을 주는 귀신들을 능히 압제하는 능력이 있는 상서로운 동물로
숭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축귀와 벽사의 동물로 닭을 상정하고 닭 그림, 닭 피, 닭 등으로 사용하는 풍속이 많다. 옛날
사람들은 귀신들이 닭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였고, 이 생각을 바탕으로 악귀와 모든 액을 물리치는 주술로서 사람들과
같이 귀신들이 출입하는 대문에 닭, 닭그림, 닭 피, 죽은 닭 등을 사용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正月元日> 조에 의하면, 새해를 맞이한 각 가정에서는 닭이나 호랑이, 용을 그린 세화
[鷄虎畵]를 벽에 붙여 액이 물러나기를 비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닭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와 액을 막는 제액초복
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궁합에서 닭띠와 소띠는 잘 어울리고 범띠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그 동물의 행태로서 닭, 소, 호랑이의 관계
를 그대로 인생사에 결합한 것이다.
장닭이 홰를 길게 세 번 이상 치고 꼬리를 흔들면 귀신과 호랑이도 민가에서 물러간다고 한다. 호랑이는 닭이 우는소리
를 무척 싫어한다. 닭(酉)은 서방(西方)이고 서쪽은 흰색(白)이므로 호랑이는 흰색을 또한 두려워한다고 한다. 반면에
소는 닭의 울음소리를 좋아하고, 여물을 먹은 후 반추위로 되새김을 하면서 "꼬끼오"하고 우는 닭의 울음소리에 맞추어
반추위 운동과 쉼을 한다고 한다. 민가에서 닭둥우리를 소마구간과 같이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닭띠와 범띠가 혼인
을 하면 잘되지 않고, 소띠와는 잘 맞는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닭과 호랑이의 생태에 따라서 해석한 것이다.
닭 그림은 정초(正初) 벽사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입신출세와 부귀공명,자손중다(子孫衆多)를 상징하는 그림 소재
로 쓰이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의 그림을 걸었다. 닭은 입신출세(立身出世)와
부귀공명(富貴功名)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닭이 머리 위에 볏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관(冠)을 썼다고 하였다. 관
을 쓴다는 것은 학문적 정상의 표시이며, 벼슬을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또 닭과 함께 맨드라미를 같이 그리는데, 이는
"冠上加冠"이라 하여 입신출세를 위한 길상적, 상징적 표현이었다. 맨드라미 역시 그 모양에서 유추된 닭이 볏과 같은
의미이다. 말 그대로 관 위에 관을 더한다는 뜻이니 최고의 입신출세를 의미한다. 그리고 부귀와 공명을 바라는 뜻에
서 수탉이 길게 우는 모습을 모란과 함께 그렸다. 모란도 부귀를 상징하며, 수탉은 공명을 상징한다.
조선 후기 화가 변상벽(卞相璧)이 그린 닭 그림은 어미 닭과 열댓 마리의 병아리를 그려 오복의 하나인 자손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을 상징화하고 있다. 조선 시대 목가구의 경첩에서 장식 문양으로 닭 그림이 나온다, 닭의 그림이 그려진
술잔 계이(鷄彛)는 종묘 제사의 강신의례(降神儀禮) 때에 쓰이는 제기(祭器)이다. 그 잔에 봄에는 정화수, 여름에는
울창주(鬱창酒)를 가득 담아 제를 올린다. 이때 닭은 조상신의 도움으로 천하가 편안하기를 염원하는 인간의 사신
(使臣)이 된다.
결혼식 초례상에는 반드시 닭이 필요하다. 신랑 신부가 초례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서 백년가약을 맺는다. 닭을 청
홍 보자기로 싸서 상위에 놓거나, 때로는 동자가 닭을 안고 옆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즉 닭을 놓고, 닭 앞에서 일생의
인연을 맺고 행복을 다짐하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옛날에 나라 임금끼리 서약을 하고 말피로 맹서했다고 하는데 부부
인연의 서약은 닭으로 맹서하는 것 같다. 혼인의례가 끝나고 신부는 시부모와 친족 일동과의 첫 대면의 폐백례를 드릴
때도 닭고기(鷄肉脯)를 놓고 절을 한다. 혼인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평생 의례인데 이때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닭을
길조 서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대개 닭을 사육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손쉽게 잡을 수 있다. 새신랑이 처가에 다녀왔다면 인사가
이것이다. "씨암탉 몇 마리 먹고 왔느냐"는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 대접하는 관습에서 신랑이 장모한테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헤아리는 말이었다. 장모에게 있어 가장 귀한 손님은 사위이다. 딸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사위가 오면 장모는 서슴없이 씨암탉이라도 잡아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씨암탉을 잡으면 병아
리를 깔 수 있는 알을 못 낳는데도 사위를 위해서라면 잡아 대접하는 장모의 사랑이었다. 손님으로 가서 그 집의 씨암탉
을 얻었다면 최고의 대접인 것이다.
씨암탉이 낳은 계란도 친척의 생일이나, 환갑, 결혼 때 짚으로 달걀 꾸러미에 한 꾸러미를 싸서 부조를 했다. 오늘날처럼
현금을 봉투에 넣어서 내미는 것과는 달기 평소에 가정에서 손수 기르던 닭이나 계란을 선사하는 것이다. 계란을 하루에
하나 밖에 낳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모아 두었다가 10개가 되면 한 꾸러미를 만들었으니, 모으는 마음의 정성 또한 대단
했다. 출가한 딸이 근친을 갈 때 친정 부모를 위해 닭을 가지고 갔다. 닭은 정성스런 정의 표시로 활용되었다.
구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지난해의 불행은 모두 사라지고 행복만 가득하라는 말 가운데 " 닭이 우니 새해의 복이
오고 개가 짖으니 지난해의 재앙이 사라진다"라는 덕담이 있다. 닭은 보양자(保養子)하고 가족의 보호와 생활권을 위해서
용감하게 투쟁하고 시간의 흐름, 세상의 변화를 판단하는 서조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닭을 영물로 여기고, 설날 첫
아침 식사, 백연가약 혼인 의례의 증인으로, 그리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 닭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우렁
찬 닭의 울음소리! 그것은 한 시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서곡(序曲)으로 받아 들여졌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개>
11) 개[戌]
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늘 인간의 주위에서 존재해 왔다. 때로는 구박과 멸시와 버림을 받고, 지신의 몸을 희생하기도
한다. 인간이 개를 버려도 개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의 주위를 맴돌면서 더러는 사랑도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
서 개는 우리의 일상생활 문화에서 인간의 주위를 구성하는 풍경(風景)처럼 존재한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이야기나 속담,
신앙, 미술 등에서 개의 이러한 행태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개는 인간과 함께 오랜 생활을 해 오는 동안 인간과 거의 동
일시하여 왔다. 그래서 "개는 사흘만 기르면 주인을 알아본다"라는 속담이나, 자기 자식을 가리켜 "우리 강아지!"라고 부
르는 애칭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 시기를 같이 살아온 개는 동과 서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헌신하는 충복(忠僕)의 상징이다. 특히 설화에 나타나
는 의견(義犬)은 충성과 의리를 갖춘, 우호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을 한다. 의견 설화와 의견 동상, 의견 무덤 등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는 전국에서 전승된다.
그런가 하면 서당개, 맹견, 못된 개, 미운개, 저질 개, 똥개, 천덕꾸러기 개는 비천함의 상징으로 우리 속담이나 험구(욕)에
많이 나타난다. 동물 가운데 개만큼 우리 속담에 자주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다. 개살구, 개맨드라미 등 명칭 앞에 '개'가
붙으면 비천하고 격이 낮은 사물이 된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의 멸망에 앞서 사비성의 개들이 왕궁을 향해 슬피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슬
피 울면 집안에 초상이 난다 하여 개를 팔아 버리는 습속이 있다. 또, 개가 이유 없이 땅을 파면 무덤을 파는 암시라 하여
개를 없애고, 집안이 무사하기를 천지신명에게 빌고 근신하면서 불행에 대비한다.
무속 신화, 저승 설화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는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길을 안내해 주는 동물이 하얀 강아지이다.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옛 그림에서도 개 그림이 많이 나온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문자의 의미로 바꾸어 그리는 경우가 흔하다. 개가 그려진 그림
을 보면 나무 아래에 있는 개 그림이 많다. 이암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와 모견도(母犬圖), 김두량의 흑구도(黑狗圖)
등이 그 예인데, 나무(樹) 아래에 그려진 개는 바로 집을 잘 지켜 도둑 막음을 상징한다. 개는 '戌'(개 술)이고, 나무는 '樹'
(나무 수)이다. '戌'은 '戍'(지킬 수)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戍'는 '守'(지킬 수)와 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樹'와도 음이
같기 때문에 동일시된다. 즉 "戌戍樹守"로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킨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은 개의 그림을 그려 붙임으로써
도둑을 막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일종의 주술적 속신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각저총의 전실과 현실의 통
로 왼편 벽면에도 무덤을 잘 지키라는 의미에서 개그림을 그려 놓았다.
불가에서는 개를, 특히 개고기를 금기시한다. 눈이 셋 달린 개는 삼목대왕의 환생물이라는 불교 설화와 후대에 내려오면
서 형성된 개가 조상의 환생이라는 속신으로 인해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고, 사찰이 대개 산 속에 있으므로, 이를 먹고
절에 가면 개고기 냄새가 나서 호환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속신으로 더욱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런가 하면 유가(儒家)에서는 개를 크게 금기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 극도로 중시하는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개
고기가 술안주로 나온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하여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속담에서 개의 비유는 어리석은 사람, 비천한 것, 도덕적이지 못한 것, 혹은 더러운 것, 쓸데없는 짓 등 좋지 않
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개는 우리와 생활 속에 밀접하게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개의 적나라한 일거수 일투족이 속담
에서 그려진다. 하찮은 존재에 대한 비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비유, 우둔하고 어리석은 모습, 약자로서의 모습, 무식
한 이미지에 대한 비유, 보기 흉한 모습, 굶주린 모습, 게으르고 태만한 모습 등 비천함의 대명사로 속담에서 개가 묘사
된다.
민요에는 개가 사랑의 방해자, 잠자는 아기를 깨우는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낯선 사람을 보면 짖
어대는 속성으로 인해 사랑을 훼방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남몰래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님이 밤에 오시는데 그 때마다
짖어 대는 야속한 개를 민요에서 한탄했다. 통영 지방에서 전승되는 개타령에 보면
개야 개야 깜둥 개야 / 개야 개야 깜둥 개야
가랑잎만 달싹해도 짖는 개야
청사초롱 불 밝혀라 / 우리임이 오시거든
개야 개야 깜둥개야 / 개야 개야 깜둥개야
짖지를 마라 짖지를 마라 / 멍멍멍멍 짖지를 마라
개야 개야 삽살개야 / 개야 개야 삽살개야
나뭇잎만 달싹해도 / 멍멍멍멍 짖지를 마라
한산도야 만물어 보자 / 우리임 외거든
개야 개야 삽살개야 / 개야 개야 삽살개야
개야 개야 백설개야 / 개야 개야 백설개야
문풍지만 달삭해도 짖는 개야
밤중 밤중 야밤중아 / 우리임이 오시거든
개야 개야 백설개야 / 짖지를 마라 짖지를 마라
멍멍멍멍 짖지를 마라
개야 개야 노랑개야 / 개야 개야 노랑개야
달그림자만 보아도 짖는 개야
오동추야 달밝은 밤에 / 우리임이 오시거든
개야 개야 노랑개야 / 짖지를 마라 짖지를 마라
멍멍멍멍 짖지를 마라 가랑잎만 달싹해도, 나뭇잎만 굴러가도, 문풍지만 떨어도, 달그림자만 보아도 짖는 개를 밤중밤
중 야밤중에 우리임이 오시더라도 짖지말라는 임을 그리는 여인의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다. "자장자장 자장/ 돌이야
자거라/검둥개야 짖지마라/흰둥개야 짖지마라" 하며 아기 잠재운다. 그러나 어머니의 등에서 고이 잠든 아기의 단잠
을 깨우는 것도 멍멍 짖는 개소리다.
개에 대한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헌, 고분 벽화, 설화, 신앙, 그림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한국 문화에 나
타난 개는 충성과 의리의 충복, 심부름꾼, 안내자, 지킴이, 조상의 환생, 인간의 동반자 등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비천
함의 대표격으로 등장한다.
예로부터 개는 집지키기, 사냥, 맹인 안내, 수호신 등의 역할뿐만 아니라, 잡귀와 병도깨비, 요귀 등 재앙을 물리치고
집안의 행복을 지키는 능력이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흰개는 전염병, 병도깨비, 잡귀를 물리치는 등 벽사(壁邪)능력
뿐만 아니라 집안에 좋은 일이 있게 하고, 미리 재난을 경고하고 예방해 준다고 믿어왔다.
<▲ 대웅전 올라가는 길의 십이지신상/돼지>
12) 돼지[亥]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고 어쩌다 돼지꿈을 꾸면 재수 좋은 꿈을 꾸었다고 기뻐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돼지가 새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빨리는 사진을 걸어 놓고 일이 잘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점에는 새해 첫 돼지날[上亥日]에 문을 열면 한해 동안 장사가 잘된다는 속신도 있다.
죽어서도 돼지혈(穴)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믿어왔다.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돼지를 부(富)와 복(福)의 상징으로, 돼지꿈을 재운(財運)과 행운(幸運)의 상징으로 여겨 왔다. 많은 사람들이 돼지해를 맞으면서 무언가 행운과 재운이 따를 것으로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돼지는 기후, 풍토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여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돼지는 그 조상인 멧돼지 때부터 후각이 발달되어서 사료 사육자 새끼 대소변 등을 구별할 수 있다.
코끝에는 연골판이 있고 촉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땅을 파면서 풀뿌리. 벌레 등 먹이를 얻는 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멧돼지는 '먹성'과 '야성'의 화신으로 냄새 맡는 데는 귀신이다. 몇 리 밖 엽총의 화약 냄새까지 식별해 낼 정도이다. 멧돼지의 성질은[猪突的]이란 말이 있듯이 대담하고 난폭하고 영리하기가 여우 이상이다.
돼지우리 주변은 항상 습기가 차고 더러운데, 이것은 돼지의 땀샘이 발달하지 못하여 체내의 모든 수분이 소변으로 배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설 장소를 따로 만들어 주면 배설물이 있는 곳의 냄새를 맡고 그 장소에서만 배설하며, 누울 곳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한다. 보통 돼지우리는 지저분한 것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지만 실은 소나 닭보다 더 깨끗한 동물이다.
석기 시대 동물상(動物相), 조개더미[貝塚], 토우(土偶), 토기(土器) 등 고고 출토 유물에서 돼지의 조상 격인 멧돼지 뼈와 이빨이 다수 출토되고 있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가축으로 길들여지기 이전에 야생의 멧돼지가 한반도 전역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돼지의 사육은 이러한 고고 자료와 {三國志 魏志 東夷傳}등의 기록으로 보아 약 2천년 전에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史記} 琉璃王, 山上王 편이나, {三國遺事} 射琴匣조, {高麗史} 高麗世系편에서 돼지는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돼지는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祭物)임과 동시에 국도(國都)를 정해 주는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전해진다. 즉, 돼지는 예언자, 길잡이 구실을 하여 명당(明堂)을 점지해 주거나, 왕의 후사(後嗣)를 낳아 줄 왕비를 알려주었고, 왕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해주었다.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祭典)의 희생(犧牲)으로 바쳐졌다. 고구려의 교시(郊豕), 삼월 삼일 하늘과 산천의 제사, 12월 납일의 제사, 동제와 각종 굿거리, 고사(告祀)의 제물로 의례껏 돼지 머리가 가장 중요한 '제물'로 모셔진다. 하늘과 땅에 제사지낼 때 쓰는 희생물로 돼지는 매우 신성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신이(神異)한 예언적 행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돼지 같은 녀석' 이렇게 욕을 하면서도 한국인은 꿈에 본 돼지는 대단한 귀물(貴物)로 친다. 만일 돼지에 개마저 덧붙이면 그 욕은 사뭇 상소리가 되는데도 돼지꿈은 용꿈과 같은 항렬이다. 한국인이 갖는 동물 꿈 가운데서 돼지는 용과 더불어 최상의 길조(吉兆)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돼지꿈과 용꿈은 길몽의 쌍벽이다. 돼지꿈은 부의 상징이다. 집안에 모시고 믿음을 바치던 '업신'이 현실의 재물신(財物神)이라면, 돼지는 꿈속의 재물이다. 꿈풀이 책을 뒤져보면 '돼지는 재물, 횡재, 소식, 벼슬, 복권당첨, 명예를 상징한다'고 되어 있다. 다음은 길몽의 돼지꿈이다.
-. 돼지를 붙잡아 매어 두었다.(호흡이 맞는 사람이 집에 들어온다)
-. 돼지 목을 누르고 다리를 부러뜨린다.(경쟁, 재판에서 이긴다)
-. 똥통에 빠진 돼지를 막대기로 건진다.(재수 있는 꿈이다)
-. 남의 집돼지를 자기 집으로 끌고 온다.(복권 당첨, 결혼, 계약 등으로 사업, 생활이 개선되고 불행이 극복된다)
-. 돼지를 실어다가 우리에 몰아 넣는다.(재물이나 돈이 생긴다)
-. 토실토실한 돼지를 쓰다듬는다.(태몽이며 부자가 될 자식을 낳는다)
-. 새끼를 낳는 것을 보거나 쓰다듬는다.(태몽이다)
-. 돼지가 따라오거나 끌어안는다.(명예가 올라가거나 입신 양명한다)
돼지 그림이나 돼지 코는 번창의 상징이나 부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장사꾼들에게는 '정월 상해일에 장사를 시작하면 좋다'는 속신이 있다. 이처럼 돼지가 재물과 관련된 것은, 돼지가 가계의 기본적인 재원(財源)이었고, 그 한자의 '돈(豚)'이 '돈(金)과 음이 같은 데에 연유한다. 장사하는 집에서는 곧잘 돼지 그림을 문설주 위에 그려 붙였다. 이것은 돼지가 한 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강한 번식력 때문이었다. 즉,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침 흘릴 시기가 지나도 침을 흘리는 아이의 목에 돼지 코를 잘라 걸어 주면 침을 흘리지 않는다고 부적처럼 걸고 다녔다.
{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상해일(上亥日)에 궁중에서는 나이가 젊고 지위가 얕은 환관 수백 인을 동원해서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주둥이 지진다."고 하며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워 주머니에 넣어 재신(宰神)이나 근시(近侍)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여인들은 상해일에 두부로 얼굴을 닦았는데, 얼굴이 희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돼지의 검은빛과 반대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의 돼지는 지신(地神)을 상징한다. 이러한 행사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특히 '업돼지' 이야기에서는 돼지가 길상으로 재산이나 복의 근원인 '업', 집안에 수호신(守護神) 또는 재물신(財物神)으로 인식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는 전라도 지방에서 채록된 '업돼지'이다.
어느 날, 주인의 눈에만 보이는 돼지 1마리가 집에 들어왔다. 10년만에 그 집안은 천 석 갑부가 되고, 주인의 벼슬도 높아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돼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주인은 곧 망할 것이라 탄식하고 있는데, 돼지들은 엽총꾼들을 유인해 와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마침 그 날 밤에 떼강도들을 엽총꾼들이 물리쳐 그 집안의 재물을 보호하였다.
돼지에 관한 설화는 몇 가지 있는데, 여러 지방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금화군의 '금돼지와 최치원', 전북 순창군의 '원님 마누라를 잡아가는 금돼지' '금돼지 자손' 등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이다.
신라 때 어느 고을에 갑자기 금돼지가 나타나 사람을 납치해 갔다. 고을 원의 부인까지 끌고 갔다. 군졸을 풀어 산 속을 샅샅이 뒤져보니 동굴 속에 금돼지가 고을 원님의 부인을 차지 하고 있었다. 부인을 구할 길 없는 원님이 돼지는 사슴가죽을 무서워한다는 얘 기를 듣고 사슴가죽으로 된 쌈지 끈을 풀어서 '네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은 사슴가죽이다'고 위협해서 금돼지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부인을 구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원님의 부인은 점점 배가 불러 열 달 후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최치원(崔致遠)이다. 이로 인해 후세사람들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금돼지의 자손이라고 일컬었다.
속담에서 탐욕스런 성정(性情)의 사람, 게으른 사람, 미련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 듣기 싫은 목소리로 크게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통 돼지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돼지 같은 욕심' '돼지는 우리 더러운 줄 모른다', '돼지 멱따는 소리',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등의 속담에서 미련하고 게으르며, 지저분하며, 먹을 것이나 탐내는 동물로 돼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돼지는 지신과 풍요의 기원, 돼지꿈, 돼지 그림, 업돼지 등에서 길상으로 재산(財産)이나 복(福)의 근원, 집안의 재물신(財物神)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돼지는 속담에서 대부분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돼지는 상서로움과 탐욕스러움의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갖춘, 이른바 모순적 등가성(矛盾的 等價性)을 지니고 있는 십이지의 마지막 열두 번째 띠동물이라 할 수 있다.
<▲ 승가사 점심 공양>배가 고프신 분은 누구라도 들어가시어 식사를 하고 가시면 되겠죠
<▲ 승가사 식당>
<▲ 승가사 종루>
<▲ 승가사 대웅전>대웅전 아래에서 보면은 바로 위쪽에 자리 잡은 사모바위가 보입니다>
<▲ 승가사 약사전>
<▲ 승가사 약사전/석조승가대사상-보물 제1,000호>
<▲ 승가사 향로각>
<▲ 향로각 우측 계단 쌍용교를 지나서 108 계단을 오르면 맨 꼭대기에 <마애석가여래좌상>님이 묵념 중이십니다>
<▲ 마애석가여래좌상님께서 중생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 삼각산 승가사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 215호>
<▲ 마애여래좌상에서 내려다 본 108계단 아래의 향로각>
<▲ 승가사 산신각>
<▲ 승가사 산신각 내부 모습>
<▲ 예비용으로 준비해 온 떡과 얼음물, 사과>
승가사에서 내려오다가 식탁과 의자가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 삼거리 쉼터의 이정표> 구기분소까지 800미터랍니다.
<▲ 삼거리 쉼터의 탐방로 안내도>
이곳에서 문수봉으로 오른 다음 왼쪽으로 가면 의상능선 오른쪽으로 가면
대동문, 진달래능선, 백운대로 이어집니다.
<▲ 다리 이름이 예븝니다. 버들치교, 박새교 등...>
<▲ 쇠무릎>
<▲ 구기탐방지원센터>
<▲ (만남의교) 다리 건너 만남의 장소> 약속을 정하고 이곳에서 만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사근초(서양등골나물)>
이제 마악 꽃을 피우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토종인 등골나무가 남성적이라면
서양등골나무의 꽃 핀 모습은 여성적인 모습입니다.
일가 친척 먼 곳에서 자립해야한다는 강박 때문일까요.
대체적으로 귀화식물들은 번식력이 왕성한데 이 서양등골나물 또한 마구잡이로 번식을
하여 환경 유해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삼각산 안내도> 삼각산 능선이란 능선은 거의 한번쯤 가본 것 같은데 구석구석 아직 안 가 본 곳이 많습니다.
<▲ 자연보호헌장>
차를 타러 터덜터덜 내려오다 보면 이 <자연보호헌장> 비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못 읽어보면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읽어봅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살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간다. 옳은 말씀입니다.>
<▲ 오동나무 열매>
애기 주먹만한 보라색 초롱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더니 어느덧 세월은 씨앗으로 그 형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는 세월 누가 어찌 막으리오...
아무도 막을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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