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우물 밖 동네 /김명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2.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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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밖 동네

 

김명인

 

 

예전의 우물은 마을의 중심이어서

동네마다 공론이 샘솟는 우물 하나쯤은 갖춰놓았다

누구든지 말은 풀고 소문은 긷고

수다가 지나쳐 이끼가 피면

손 없는 날을 받아 두레로 청소했었지

 

우물 밖 동네란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제 양껏 기갈을 채워도 찡그리지 않는 물낯이 있어

하늘을 축이며 구름도 어루만지며

세월과 함께 느리게 혹은 빠르게 늙어갔지

이제 누구도 그 전설에서 물 긷지 않아서

허공 혼자 펼쳤다 거두는 저만의 얼룩

 

이야길 길어 올리려 두레박을 내린 것 아닌데

이 우물, 너무 메말라서 수면조차 없네

들여다보면 캄캄하게 웅웅거려 더욱 골똘해진 그리움

별똥별 떨어져 표시하는 예전의 우물 자리에 서서

물 긷던 사람들의 아득한 별자리 헤아려본다

 

사라진 동네에 우물이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지워져버린

저 오랜 가난 깨우지 마라

사무친 전설들 뼛속 깊이 저며 올 때까지

 

 

시집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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