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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 7000점 표본 만든 `잡초박사` 강병화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명예교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2. 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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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들풀 7000점 표본 만든 `잡초박사` 강병화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명예교수

입력2019.11.15. 오후 5:06

문광민 기자

 

 

식용·약용은 물론 향료·염료까지
세상에 쓸모없는 잡초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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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안암동 연구실에서 만난 강병화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명예교수가 한국에서 자생하는 자원식물 종자 표본을 식물별로 분류해놓은 모음판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세상에 쓸모없는 잡초는 없다"고 말했다. [김재훈 기자]서울 성북구 안암동 어느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건물의 계단을 다 걸어 오르자, 활짝 열린 401호 현관문 너머에선 말라가는 풀 냄새와 갓 뜯은 풀 냄새가 은근하게 흘러나왔다.

강병화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명예교수(72)는 품이 넉넉한 바지에 체크 무늬 셔츠와 등산조끼를 입은 채 주섬주섬 푸른 풀 꾸러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강 교수는 "이제 막 남양주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며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풀을 가리켰다. 그는 "설탕보다 당도가 300배 높은 감미료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라며 스테비아 잎을 직접 음미해보라고 권했다.

강 교수는 독일에서 잡초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1983년 말부터 현재까지 잡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들풀, 야생식물, 자원식물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결국 잡초로 뭉뚱그려지는 풀을 찾아 그는 지난 36년간 전국을 누볐다. 야외 현장조사만 4900일 넘게 나갔다. 평생 잡초를 공부했지만 '잡초'는 없더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거리가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던 어느 오후, 안암동 연구실에서 강 교수를 만나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잡초에 대한 그만의 시각과 한 분야만 진득하게 파고든 비결을 물었다.

―입고 계신 조끼 주머니엔 무엇이 들어 있나.

▷비닐봉지를 몇 장씩 챙겨 다닌다. 큰 것, 작은 것 크기별로 있다. 모두 표본을 담는 용도다. 생태조사를 다니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야생식물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미 씨앗도 다 익어서 곧바로 채집하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언제든 종자와 표본을 얻을 수 있도록 비닐봉지를 항상 주머니에 담고 다닌다.

―학부 때 '농학'을 전공하셨다.

1960년대에는 모두가 배고팠다. 내가 대구상고 2학년에 재학하던 때 다섯 살쯤 된 어린아이가 남의 무밭에서 몰래 무를 파먹다가 밭주인에게 쫓기던 모습을 우연히 봤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식량 증산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로 농학과에 진학했다.

―연구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아버지께선 내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셨다. 기술고시에 응시했지만 2차에서 낙방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제초제와 생장조정제를 연구했다. 대학원 졸업 후엔 수원 농촌진흥청 연구요원으로 채용돼 잡초방제 연구를 계속했다. 독일 호엔하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로 돌아왔다.

―연구 분야가 '제초제'에서 '잡초'로 바뀐 계기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초제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았다. 반면 잡초를 전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잡초부터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잡초는 다 자라서 식별될 때쯤이면 다른 작물에 해를 끼친 뒤이기 때문에 초기에 방제하는 게 중요하다. 처음엔 이런 이유로 잡초를 공부했다. 1983년 말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자, 저울,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잡초를 연구했다. 3년 지나니 나보다 잡초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잡초 공부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잡초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연구비 받기가 어려웠다. 1980년대엔 제초제를 연구한다고 하면 농약회사에서 연구비를 줬다. 그래서 농약·제초제를 연구하면서 잡초를 같이 연구했다. 연구비를 목적에 맞게 철저하게 집행해야 하는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큰일 날 일이다(웃음).

―'잡초' 대신 '자원식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시는데.

▷모든 식물은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용도가 다를 뿐이다. 식물은 식용·약용은 물론 향료, 염료, 조경, 섬유, 공업, 환경보호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된다. 다시 말해 모든 식물이 '자원'인 셈이다. 자원식물이란 용어는 내가 만들어냈다. 세상에 쓸모없는 '잡초(雜草)'는 없더라. 그리고 이름 없는 풀도 없더라. 단지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

―종자 채집 시기는 어떻게 잡나.

▷종자가 익을 때를 포착하기 위해 계속 봐야 한다. 식물은 꽃이 피어야 그 식물이 뭔지 알 수 있다. 어릴 때 모습만으로는 제대로 모른다. 야생식물은 꽃잎이 금방 진다. 야생식물 종자를 채집하려면 식물에서 꽃이 피기 전부터 꽃이 피고 나서까지 틈틈이 살펴봐야 한다. 씨앗을 제때 얻으려면 대여섯 번은 가야 된다.

―풀을 좋아하는 이유는.

▷풀은 때와 장소에 따라 꽃 모양, 잎 모양이 다 다르다. 가을에 꽃피운 민들레는 봄과 달리 꽃이 굉장히 작다. 같은 자리에 있는 풀일지라도 오늘 본 모습이 다르고 내일 본 모습이 다르다. 반면에 나무는 언제 봐도 그 자리에 있고 잎 모양이 대개 비슷하다.

―어려운 질문을 드리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식물은 무엇인가.

▷민들레를 가장 좋아한다. 명함에도 민들레 사진을 넣었다. 명함에 들어간 사진은 우리 토종 민들레다. 들판이나 길가에 피는 민들레도 좀민들레, 산민들레, 흰민들레, 서양민들레 등 종류가 여럿이다. 꽃잎이 수북하고 샛노란 게 서양민들레다. 서양민들레는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다. 우리 민들레가 화려해 보이진 않아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다.

 

―직업병이 있다면.

▷나는 풀밖에 안 보인다. 집 앞에서 운동을 하는데 모르는 남녀가 나에게 인사를 했던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이더라. 그걸 몰라봤던 것이다. 풀은 한 번 보면 안 잊고, 풀 이름도 한 번 들으면 아는데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길을 걸어도 풀만 보이지 다른 게 안 보인다. 풀이 머릿속에 박혀서 내 팔자가 그렇다.

―은퇴 8년째인데도 달력에 일정이 빼곡하다.

▷겨울을 제외하곤 한 달 중 열흘 이상을 밖으로 다닌다. 어제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울대 약초원에 갔다. 아침 9시에 가서 오후 2시까지 꼬박 조사하다 돌아왔다. 이제 가을이라 풀도 다 씨앗을 맺고 시들어간다. 그만큼 사진 찍을 일도 줄어든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 2월 초에 냉이가 꽃피우면 금방 또 봄이다.

―그동안 얼마나 야외조사를 나갔나.

1984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만 4888일을 자원식물 씨앗을 받으러 다녔다. 작년 한 해에만 114일을 생태조사에 썼다. 그때그때 조사일지에 기록하면서 날짜를 체크한다. 하여튼 미친 듯이 다녔다. 이제 조금 놓으려고 해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틈만 나면 풀 찾으러 나간다.

―그만큼 가족과 보낸 시간은 부족했겠다.

▷아니다. 나 혼자 그렇게 다녔으면 집에서 쫓겨났을 거다(웃음). 야외조사를 못해도 3000일은 아내와 같이 다녔을 것이다. 이건 농담인데, 젊었을 적에는 나 혼자 다니다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아내가 따라다녔다. 이제는 아내가 내 귀가 돼 같이 다닌다.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서 보청기를 낀 지 꽤 됐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고맙다. 식물 종자를 수집하는 일도 아내와 함께했다. 국내외 식물원이나 국립공원 등에선 허가 없이 채종하는 일이 금지돼 있지만 우리는 국가 연구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종자를 훔쳤다. 나는 망을 보고 아내는 종자를 채취했다. 일종의 부부절도단이었다. 7000점 넘게 수집했던 종자들 중 절반가량은 아내가 받았다. 당시엔 외국 사람들도 우리나라 식물을 그런 방법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죄의식은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종자를 정년퇴임 이후 학교에 모두 기증하셨다.

▷내가 다 가지고 있어봐야 어디 쓰겠나. 종자를 하나하나 수집하는 과정이 지난하다 보니 솔직히 누군가 "종자 하나 달라"고 하면 내 살점을 떼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했으니 기증은 그 자체로 보람 있었다. 당시 기증했던 게 자원식물 1700여 종 씨앗이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이 넘는 가치라고 들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들로 산으로 다니시면서 위험했던 적도 더러 있었겠다.

▷언젠가 동료 교수가 산토끼꽃을 구해다 달라고 했다. 월악산 계곡에 가면 산토끼꽃이 많은데, 하필이면 장마철에 갔다. 장마철엔 산토끼꽃만 많은 게 아니라 뱀도 많다. 독사는 사람이 가까이 가면 도망가지만 자신을 건드리면 꽉 문다. 하필이면 돌멩이를 치우다 뱀 꼬리를 밟았다. 다행히도 뱀이 옷 위를 물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연구실에선 어떤 작업을 주로 하나.

▷야외조사 나가서 찍었던 생태사진을 정리한다. 언제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지, 식물의 우리말 이름과 국가별 이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명(學名) 등을 기록한다. 받아둔 야생식물 종자도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밀봉한다.

-연구물 정리 작업에 집중하는 이유는.

▷정리를 해놔야 후학들이 공부하지. 아무리 자료를 많이 남겼어도 이걸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 단순히 사진만 봐서는 이게 어떤 식물인지 구별하기도 어렵다. 식물분류학자 등 전문가들도 식물 사진만으론 판별이 어렵다고 표본을 가져오라 한다.

―한 분야에 천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볼 때마다 새로우니까, 풀은. 언젠가 내가 태백산에 간다고 하니 제자들이 물었다. 작년에 갔는데 뭐 하러 또 가느냐고. 그런데 나는 갈 때마다 풀이 새롭게 보인다. 같은 종의 풀이라도 찍는 장소에 따라 또 다르다. 관심을 가지고 자꾸 봐야 한다. 지금까지 고려대 농장에만 수백 번 갔는데 갈 때마다 보이는 풀이 다르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40년이 됐다.

40여 년간 주변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나.

▷주위 풀들이 다 달라졌다. 대개 귀화식물들이 자리를 다 차지했다. 덩굴식물과 외래식물이 만연하면서 식물다양성은 단순해지고 생물생태계 건전성이 파괴되고 있다. 다양성이 보전돼야 면역성도 생기고 생태계가 유지된다. 쓰레기도 문제다. 간혹 덩굴식물 속에 썩지 않는 쓰레기가 쌓여 있기도 하다. 참 안타깝다.

―풀을 공부하면서 깨닫는 점은.

▷독일에서 유학하던 당시 지도교수가 "식물은 일요일이 없다"고 했다. 식물 연구는 생육 시기별로 정확하게 식별해 종자를 수집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식물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놀 거 다 놀고 하다 보면 결과가 안 나온다. 유학을 다녀온 지 36년 됐는데 일요일에 쉰 기억이 없다.

―앞으로 목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외장하드에 생태사진이 50만여 장 있다. 용량으로는 5테라바이트(TB)다. 아무리 자료가 많아도 정리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다. 지금도 새벽 3시에 일어나면 잠이 안 온다. 풀 생각이 나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웃음).

▶▶ He is

1947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73년 고려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농학석사(작물재배학), 독일 호엔하임대에서 농학박사(잡초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4년부터 고려대 농과대학(현 생명과학대학)에서 28년간 강의했다. 2012년 2월 정년퇴임 이후에도 연간 100일 이상 현장조사를 다니며 전국을 누비는 등 야생자원식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약과 먹거리 식물도감' '우리 주변식물 생태도감' 등이 있다.

[문광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