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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게 Ⅰ
이하(李下)
빈집은 이름을 얻지 못한 풀들이 지천이다. 문을 열자 낯선 바람이 함께 들어섰다.
대밭에 불던 바람은 무관한 이웃처럼 지나갔다. 허물을 벗어놓고 떠난 집. 오랜 세월을 쌓아온 서랍을 훔치듯 열어본다. 푸른 봄날이나 한때 여름 잎새처럼 성성한 날들이 만들었을 털실원피스의 마른 얼굴을 만지며 어류처럼 누웠던 그녀 숨결과 부피 가볍던 시간을 생각한다. 아내의 두 눈은 분홍 꽃잎의 강물 속으로 빠져든다.
비바람에 다 지워졌으리라 여겼지만 올 빠진 날개를 감춰둔 서랍 안에선 기억의 무게들이 차곡히 펼쳐진 채 빈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등 두드리는 봄 햇살 그 따스한 손길을 받은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는 오래 들썩였다.
봄비가 내려 꽃 진 뜰 한 켠에 지난해 보이지 않던 수선화. 여린 꽃을 피우며 홀로 서 있다.
봄날 풍경이 어스름에 지고 달빛은 분홍 꽃잎이 남겨진 뜰 위에서 긴 밤을 홀로 춤추고 있다. 서랍을 닫자 레퀴엠처럼 긴 여운의 바람이 다시 멈추었다. 고요의 기억을 감춘 빈집은 무게를 잃은 어둠의 영역으로 다시 아득해졌다.
―웹진『시인광장』(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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