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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통행
박찬송
어느 날 좌측에서 우측으로 보행 방향이 바뀌었다
아버지 제사에 가는 날, 우측통행에 서툰 내 발이
고개 숙인 휴대폰에 짓밟힌다
전동차 안에서 머리 허연 남자가
임산부 배지를 단 여자에게 삿대질을 한다
모멸을 견디지 못한 젊은 여자
슈퍼문의 배를 안고
지하철 밖으로 뛰쳐나갔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손이 그 자리에 앉는다
우측통행을 하는 흰 머리와
노란 리본을 달고 좌측통행을 하는 촛불
요란한 함성이 내 귓바퀴를 돌린다
내겐 어린 날의 아버지에게 가는 길이 급한데
모든 길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방망이가 나를 한쪽으로 몬다
침범할 수 없는 중앙선조차 사라져
헉헉대는 계단이 나를 지하로 끌고 간다
험한 구호를 피해 땅 밑으로 내려간 내 발은
통통하게 부었다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는 지하철 노선 여기저기
낡은 상수관의 물줄기처럼 사람들을 쏟아놓는 열차
시청 역에서, 외선 순환열차를 타야 할지
내선 순환선을 타야 할지 갈등할 때
성수행과 신도림행 열차가 동시에 들어온다
아무리 직진을 해도 같은 길만 돌아가는 순환선
그 길을 법이라고 믿으며
같은 노선의 사람들만 태우는 전동차
서로 반대쪽을 향해
끝도 없이 속도를 낸다
―시집『내 귓속에는 누군가의 애인이 산다』(문학의전당,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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