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우측통행 /박찬송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6. 2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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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통행

 

박찬송

 

 

어느 날 좌측에서 우측으로 보행 방향이 바뀌었다

아버지 제사에 가는 날, 우측통행에 서툰 내 발이

고개 숙인 휴대폰에 짓밟힌다

전동차 안에서 머리 허연 남자가

임산부 배지를 단 여자에게 삿대질을 한다

모멸을 견디지 못한 젊은 여자

슈퍼문의 배를 안고

지하철 밖으로 뛰쳐나갔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손이 그 자리에 앉는다

우측통행을 하는 흰 머리와

노란 리본을 달고 좌측통행을 하는 촛불

요란한 함성이 내 귓바퀴를 돌린다

내겐 어린 날의 아버지에게 가는 길이 급한데

모든 길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방망이가 나를 한쪽으로 몬다

침범할 수 없는 중앙선조차 사라져

헉헉대는 계단이 나를 지하로 끌고 간다

험한 구호를 피해 땅 밑으로 내려간 내 발은

통통하게 부었다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는 지하철 노선 여기저기

낡은 상수관의 물줄기처럼 사람들을 쏟아놓는 열차

시청 역에서, 외선 순환열차를 타야 할지

내선 순환선을 타야 할지 갈등할 때

성수행과 신도림행 열차가 동시에 들어온다

아무리 직진을 해도 같은 길만 돌아가는 순환선

그 길을 법이라고 믿으며

같은 노선의 사람들만 태우는 전동차

서로 반대쪽을 향해

끝도 없이 속도를 낸다

 

 

 

시집내 귓속에는 누군가의 애인이 산다(문학의전당,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