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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치마
김휼
저녁을 잘 드셨다던 어머니는 그 밤 치마를 입었다
윤달이면 매만지던 하얀 삼베에 별빛을 덧댄 스란치마 두 손은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몸속에 배인 습관이 남겨준 자세 미처 다 빼진 못한 손톱 끝의 쑥물이 민망할까 봐 슬몃, 소맷부리를 잡아 여며주었다 오래 누워 꽃잎처럼 가벼워진 몸을 감싸 놓은 여섯 폭 치마 그 흰빛 속에서 잠 못 들던 여름의 기억이 부풀어 올랐다 와병 중에도 먼 길 입고 갈 옷 정갈하게 시침질해 놓은 당신, 주인 떠난 빈집 고졸한 마루에 앉아 눈물샘에 얼비친 꽃잎을 본다 어머니 따뜻한 안부 같은 하얀 자미 꽃 어느새 치맛자락으로 몸 바꾼 꽃잎이 가지 끝에서 펄럭인다 말이 고픈 나는 치마폭에 숨겨 가진 말이 있나 꽃잎을 가만 들춰본다
이 꽃 지면, 흰쌀밥 한 그릇 지을 수 있겠지
ㅡ 『시와사람』(202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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