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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지는 계절에 서어나무가 되어
조향옥
그때처럼 벗고 있네요
단정한 목덜미 서 있네요
처음 돋는 것들은 아팠어요
빨간 잎눈으로 터졌어요
온몸 구석구석 건드리지 않아도 터졌어요
숨기고 싶은 것 잎사귀 밑에 감추었어요
청량산 서어나무를 보세요
청춘을 겉옷처럼 벗어들고 단풍 속으로 걸어가네요
이름표 단 젊음이 사열하듯 서 있네요
나는 구름이 되기로 하여요
빗물이 되기로 하여요
다시 구름이 되기로 하여요
굵은 허벅지 건강한 팔다리
나는 비가 되어 한 백년 너의 몸 씻어 주었느니
저기를 보세요
물들어 붉고 노란 것들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붙들고 비탈져 울고 있네요 떨
어지고 있네요
그 모자, 그 목덜미, 그 옷, 그 빗물, 그 단풍
이제 나는 서어나무가 되겠어요
통증 붉은 잎눈을 기억하는 나무
건강한 팔다리 기억하는 나무
나는 그런 나무가 되어 한오백년 살아야겠어요
당신은 비가 되어 벗은 내 몸 씻어 주어요
천번 만번 키스해 주어요
나 지금 여기 있어요
―시집『남강의 시간』(애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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