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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시집『육탁』(여우난골,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