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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4. 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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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시집『육탁』(여우난골,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