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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서시 - 이성복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3. 2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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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서시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일러스트=클로이


저녁은 낮은 자리부터 온다. 어스름 녘 홀로 거리를 걸어보라. 시골버스를 타고 들녘을 지나쳐보라. 특별한 까닭이 없어도 울고 싶은, 그러나 드러내 울 수는 없는 저녁의 얼굴이 세상의 낮은 자리를 메워 오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사랑 또한 그렇다. 마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어스름처럼, 빗물처럼 고이는 그것!

'사랑은 침묵이다. 단지 시만이 그것을 말하게 한다'고 노발리스는 말했다던가 그리움이란 그래서 인간이 가진 숙명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이성복(56)의 이 시에서 나는 그리움의 길목들을 바라본다. 휑하니 비어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가. 사랑이 가득한 이 사람, 그럼에도 밥을 조르는 육체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이 사람.그가 '죽고 싶어도 짓궂은 배가 고프다'(〈다시 정든 유곽에서〉)고 노래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놀라워했던가. 거리가 미끄러운 것은 이 사람이 지금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빙판과 같다. 자꾸만 미끄러워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으며 자칫 꺼져버릴 위험의 한복판이다. 하여 이 사람은 '건너편 골목'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정처없을' 수밖에 없다. 이 정처없음이란 김춘수 시인이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꽃〉)고 노래했을 때의 그 '몸짓'이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는데 당신은 나를 부르지 않는다! '맞은편 골목'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만이 어둡게, 어둡게 젖어들 뿐이다. 마치 그 골목과도 같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에게도 몸과 마음에 붕대를 친친 동이고 입원해 있었던 스물 몇 살이 있었다. 저녁이면 찾아오던 한 여자가 있었다. 병실 복도의 유리창으로 저녁 빛이 스밀 때 그 청춘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얼굴에 어린 저녁의 빛만이 지금도 통증처럼 남아 있다.

이성복 시인은 우리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던' 70~80년대를 가장 개성적이고 가장 아름답게 빚어낸 시인이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그는 하나의 항성(恒星)이 되었다. 그에게 빚이 없는 젊은 시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읊었던 그. 그의 은자(隱者)와도 같은 삶의 태도 또한 우리들에게 말없는 긴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