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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6>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3. 25.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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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 닳은 그리움의 모서리엔 섬집아기의 기다림이…
  • 덕적도 서포리 해변에 피어난 해당화. 장석남 시인은 유년기에 이 해변에서 해당화와 더불어 기다림과 그리움을 배웠다.

    덕적도 가는 바닷길에 내내 비가 내렸다. 섬에 당도해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바람은 더 거세어져 우산이 뒤집혔다.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서포리 바닷가로 가는 버스는 놓쳤고, 간다 해도 이 우중에 사진을 찍기도 난감하다. 시각은 이제 겨우 오전 11시경, 예전에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서너 시간씩 걸렸다던 뱃길이 쾌속정 덕분에 1시간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시인과 함께 부둣가의 식당에 들었다. 돌아가는 배는 이튿날 오후로 잡아놓았으니, 비 오는 선창에서 서두를 일 없다. 우럭백숙 곁에 술잔도 따라 나온다. 통유리창 너머 빗속으로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가 차례로 희미해진다.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서 와서 놀더라/ 이어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 모래밭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 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해걸음을 넘길 때/ 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이전(以前)이/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덕적도 시 - 해질녘’)

    유리창에 비껴 듣는 빗줄기가 봄비치고는 심하다. 장맛비 같다. 선창의 배들은 빗속에서 춤을 추는데 시인은 띄엄띄엄 말을 한다. 아직은 조금 어색한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성장기를 ‘간증’해야 하는지, 물었다. 간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친절하게 듣고 싶었다. 장석남(44) 시인은 나에게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의 시인이다. 맑고 붉은 앵두가 탱탱하게 익을 무렵에야 겨우,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것 같은 평화를 얻은 사내의 한숨이 귓전을 간질이는 듯하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에 시달리며 옹색하게 살았던가. 그리움도 고통이라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익어가는 앵두를 보니 이제야 간신히 마음을 비울 수도 있는가. 앵두나무는 서포리 시인의 집 뒤 우물가 언덕에서 자랐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옛 노트에서’ 부분)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은 대처에서 시달리며 닳아진 것들이긴 하지만, 이 시의 공간은 유년기 섬 집의 우물가 언덕이고, 그 그리움의 뿌리는 ‘섬집아기’의 기다림에 닿아 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고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 섬집 아기. 장석남은 당시 행정구역명으로는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서포리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과는 열두 살 정도 터울이 지고, 바로 윗형과도 네 살 차이가 난다. 당시 고등학교가 없었던 섬에서 대부분 중학교를 마치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으로 떠났다. 형과 누나들은 뭍으로 떠났고, 아버지도 이 가난한 섬에서 아이들 학자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 어머니가 ‘어서 떠나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인천으로 또 떠났고, 어머니마저 그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섬과 인천을 오갔지만 뭍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았고, 장석남 홀로 할머니와 더불어 섬 집을 지켰다.

    ◇덕적도 선창가 ‘할매 포장마차’. 비 오는 부두에 객들이 내려서자 창문 너머로 주인 할매가 얼굴을 내밀었다.

    하루에 한 번 왔다 가는 배가 들어오면 올라오는 사람이 있나 내려다보는 섬집 아기. 할머니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 할머니조차 어미가 왔는지 자주 내다보았다. 할머니는 19세기에 태어나 20대까지 ’나랏님’을 모신 마지막 봉건세대였다. 그런 할머니의 막내아들, 그러니까 집안의 온 기대를 모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송아지를 키워 학비를 댔던 그 막내 삼촌이 대전 신학대에서 만학을 하다가 서른 살에 요절한 비극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억지소리를 해댔고, 날이면 날마다 울었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다섯 살 무렵인데 할머니의 울음부터 들은 것 같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할머니 막내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거였어. 하지만 나는 영문도 모르고 울음소리를 들은 거고, 엄마도 없고…. 그러니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해진 게 울음소리… 할머니가 살구나무 밑에서 대성통곡을 한 다음 막내 손자인 나랑 상추쌈을 자셔. 미치는 거야. 꽃봉오리가 환희가 아니라 할머니가 울어서 피는 거여. 울어도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노인네가 육자배기조로 가락을 넣어서 하도 울어대니….”

    장석남 시인이 이 이야기를 한 곳은 그 선창가 식당이 아니었다. 우리는 비 내리는 부둣가 식당에서, 예전 서울 인사동 심야 포장마차에서 마주친 적은 있지만 대낮에 정색을 하고 본 적은 없어 그이와 약간의 낯가림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뒤, 장석남이 동창생 오빠의 민박집에 전화를 넣어 달려온 봉고차로 서포리 ‘옹진민박’에 다시 들었다. 봉고차를 타기 전, 장석남이 부둣가 방파제로 나가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는 포장막 안에서 간재미 몇 마리와 굵직한 소라를 샀다. 그리하여 비 내리는 서포리 ‘옹진 민박’의 퀴퀴한 탁자 위에 안주로 차려진 건 간재미 회와 소라였고, 내 앞의 창 너머로는 비바람에 시달리는 중키의 푸른 나무들이 회벽을 배경으로 춤을 추었다. 그곳에서 장석남은 첫 기억은 울음소리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배나무가 떨고 있다// 저 나무가 꽃이 피면/ 살의(殺意)처럼/ 꽃이 피면 청춘은/ 돌배나무 아래 사지를 펴고 그러면/ 저 나무는 청춘을 묻은/ 흰 무덤이 되는 거야// 돌배나무가 이번엔/ 춤 속에 가만히 서 있다”(‘배호 4’ 전문)

    바깥에서는 청청한 이파리를 거느린 가지들이 비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안에서는 배호가 노래를 부르는, 그 퀴퀴한 민박집에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 순간 장석남 시인이 문을 박차고 우산도 없이 튀어나가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나섰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섬을 떠나 인천으로 나갔지만 어린 그때도 섬의 파도 소리가 내내 잠자리에서 환청으로 들렸다고 했다. 차츰 환청은 잦아들었으나 그 소리는 가슴속에 스며들어 이성과 이론과 과학이라는 것들에 순치되었다가 다시, 어쩔 수 없이 꿈틀댔을 터이다.

    가랑비가 내리는 마을 고샅길을 따라 걸었고, 교회 옆길로 내려서는가 싶더니 산속으로 올라갔다. 주황기와집이 하나 숲 속에 얼굴을 내밀어 그 집인가 했더니 시인은 그곳을 지나쳐 다시 깊은 숲 속으로 올라간다. 시인은 넓은 잎의 머위들이 자욱하게 깔린 숲에 이르러 숨을 색색, 몰아쉬며 젖은 머리칼과 젖은 눈썹으로 서 있었다. 머리 위로 보라색 등꽃이 흘러내렸다. 시인의 옛집 옆에 흔적만 남은 시냇물이 풀속으로 흘렀다.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 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그리운 시냇가’ 전문)

    숲이 되어버린 시인의 옛집에서 내려와 어둑해지는 서포리로 갔다. 다만 시인의 꽁무니만 따라갔을 따름인데, 어느새 어둑해지는 해변이 나타났고, 그 해변의 망루에 오르고 있었다. 폐장 해수욕장의 해변 망루, 어둑한 밤의 그 망루 문은 잠겨 있었다. 시인은 익숙하게 깨진 창문을 넘어 한 평 크기의 그 좁은 망루의 전망대로 들어갔다. 따라서 넘었다. 바람은 어둠 속에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고, 망루 속 시인은 취기 속에 멀리 ‘한진여’를 내 보았다. ‘여’란 바닷속 돌무더기를 이르거니와, 옛날 시인의 집에서 내려다보면 바닷속에 숨어 있던 여는 물의 높낮이를 재는 검은 물속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그 위에 등대를 세워놓았다. 태풍이나 몰아쳐야 허옇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존재를 과시할 수 있던 수면 바로 아래 그 돌무더기, ‘한진여’. 시인에게는 ‘진보에 대한 상상력’을 담보한 바다 밑 바위 지형이었지만, 그마저 이제 등대에 눌려버린 셈이다.

    “나는 나인 그곳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했다/ 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 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은 늘 속에만 있다는 것을”(‘한진여’ 부분)

    망루에서 내려와 어둑한 서포리 해변을 가로질러 ‘옹진민박’으로 돌아왔다. 대학생들이 엠티 온 것처럼 우리는 떠들고 뛰었다. 이건 순전히, 시인 장석남의 과장된 악동 기질 탓이었다. 장석남은 ‘섬’이라고 발언하면 심심해서 ‘슴’이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했다. ‘슴놈’ 장석남, 그도 세월이 흐르니 이렇게 편안한 시도 쓰네.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목돈’ 부분)

     

    선임기자 jhoy@segye.com

    옛 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연보
    ●1965년 덕적도 출생,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맨발로 걷기’ 당선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산문집 ‘물의 정거장’‘물 긷는 소리’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