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함북 학성 출신인 김기림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우리에게 이 100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는 각별하다. 우리는 이 시간 동안 서양 근대문학 몇 백 년에 이르는 오늘의 한국문학을 형성해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문학사가 김기림에게 빚진 바는 적지 않다. 우리는 그를 이상,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등과 더불어 모더니스트라고 부른다. 그들은 동시대 세계문학에 비견되는 우리 문학의 현대성을 강조했다. "동양적 정적"과 "무절제한 감상의 배설"로부터 벗어나 "바다와 같이 명랑하고 선인장과 같이 건강한 태양의 풍속"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는 '오전의 시학'은 김기림만의 모토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문학이란 단연코 새로운 것, 과거와 같지 않은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으른 표범"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봄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서도 그들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그의 또 다른 시,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줄 것만 같애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봄은 전보도 안치고〉)와 겹쳐놓고 볼 때 묘한 여운을 남긴다.
봄은 분명 눈을 부시게 하고 몸을 가렵게 하며 피부에 소름이 돋도록 만드는 자극의 향연이다. 그것은 또 구부러진 등을 펴게 하며 주춤대다가도 성큼 뛰어넘게 만드는 생명의 약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기림에게 봄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과 몸과 피부와 등과 다리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갈구하는 어떤 열망, 즉 '굉장히 훌륭한 그 무엇'을 기다리는 마음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열망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봄을 노래하는 마음은 모든 감각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겨울'의 암흑을 견디는 기도에 가깝다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혹 그가 그토록 바랐던 새로운 감각의 구현은 아니었을까. 표범의 본능을 노래하는 것. 그것은 '인제사' 잠에서 깨어났지만, 곧바로 '성큼' 겨울을 뛰어넘는 문학적 도약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열망은 지금 우리에게도 김기림의 세대와 다를 바 없다. 봄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