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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위에서 읽는 시] (14)최영철 ‘수영성 와목’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4.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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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위에서 읽는 시] (14)최영철 ‘수영성 와목’
스쳐간 여인 향해 몸 기울인 나무의 순정 가슴이 시려
여름의 끝물, 남쪽 항구도시에 내리는 빛이 강렬하다. 시인이 저만치 앞장서서 매축지(埋築地) 골목길을 순례하는 중이다. 뒷머리 만지작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린다.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래 길을 낸 그 골목은 어디로 구불구불 빠져나갔을까. 지붕과 지붕이 서로 어깨를 잇대어 만들어낸 골목의 그늘에 노파들이 나와서 한담을 나눈다. 쭈그려 앉은 늙은 여인들의 머리칼이 좁은 하늘을 뚫고 내려와 꽂히는 빛줄기에 하얗게 부서진다. 노파들이 등을 기댄 시멘트벽 작은 창문들에 빨래가 너펄거린다. 넓은 마당 긴 줄에 한가롭게 펄럭이는 깃발 같은 옥양목이나, 베네치아의 후미진 물길 벽돌집 난간에 숨어서 날리던 생활의 속옷들, 혹은 서해 솔밭 사이로 얼비치던 외딴집 빨랫줄의 배냇저고리- 대체로 줄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모든 빨래는 공간과 내용을 막론하고 사람살이의 따뜻한 증거물들이어서 아늑하고 정겨웠다. 좁고 낮은 골목에도 빨래는 나부낀다.

◇부산 수영사적공원 사철나무 와목(臥木) 곁에 앉은 최영철 시인. 한 여인이 찰나에 나무의 이마를 짚어주고 지나간 것이었는데, 그 기억을 못 잊어 나무가 그네의 향방을 좇아 몸을 눕혔다고 시인은 썼다. 그는 “사실 우리 삶이라는 건 큰 사랑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스쳐가는 것들로 채워진다”고 말했다.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 한다”(‘일광욕하는 가구’ 부분)

최영철(53) 시인이 창녕에서 부산으로 나온 건 세 살 무렵이었다. 가난에 쫓겨와 시인의 부모가 항구에 정착한 곳은 산동네의 방 한 칸이었고, 사정이 조금 나아져 내려온 곳이 바다를 메워 형성한 이곳 범5동 매축지 골목길이었다. 기억이 작동하기 시작할 때부터 열 살 무렵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니 이 골목이 시인의 고향인 셈이다. 방문을 열면 바로 골목이다. 그래서 골목은 이곳 사람들의 ‘마루’ 역할을 한다. 그 마루 곳곳은 농촌에서 무언가를 키우고 가꾸던 사람들의 본능이 화분의 푸른 생명들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시인은 훗날 “탄탄대로가 승승장구하는 자들의 것이라면 골목은 거기서 비켜나거나 도태된 자들의 몫”이지만 “성공하고 쟁취한 자들의 길이 아니라고 해서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고 “탄탄대로는 질주와 추월을 요구하고 그래서 잦은 충돌이 불가피하지만 골목은 조용하고 소박하며 여유만만한 공존의 장으로 존재한다”고 산문에 썼다. 그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길가로 미닫이문이 난 집 앞에 섰다. 머뭇거리더니, 형체는 다 바뀌었는데 입구는 그대로 자신이 살던 옛집이라고 했다.

그가 이곳 오래된 매축지 골목길을 다시 찾은 건 1997년 집 앞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쳐 뇌수술을 받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온 뒤 새삼스럽게 어린시절을 더듬기 시작한 10여년 전쯤부터다. 기이하게도 시인은 사고와 인연이 깊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횡단보도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던 군용 지프에 치여 2년 동안 병원을 오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무렵의 소년기에 가슴까지 깁스를 한 채 천장만 올려다보며 누워 있어야 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곤 하던 생각 깊은 소년은 운명적으로 문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시가 허접해서 시에게 미안하다”고 짐짓 겸손한 발언을 자주 했는데, ‘시를 위한 시’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시를 살아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따뜻한 위무의 시편들이야말로 시가 그에게 고마워해도 좋을 증좌인 것 같다. 

◇부산 범오동 매축지 골목길에 최영철 시인이 섰다. 그에게 좁은 담장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골목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한 곳이다.
“또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 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연장론’ 부분)

매축지 골목에서 나와 시인이 살고 있는 수영동으로 갔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종용해서 그렇잖아도 좁아서 불편했던 집을 팔고 수영동으로 이사했던 것인데, 덜컥 팔고 보니 재개발 예정지역이었던 터여서 앉은 자리에서 적어도 수천 만원은 손해를 보았다고 남들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은 더 벌었다고 자부한다. 이사 오고 보니 바로 집 곁 수영성 사적공원에 500년 넘게 산 곰솔과 푸조나무가 있었다. 이전 집에서는 이 나무를 만나기 위해 오래 걸어 다녔는데, 사고를 당한 뒤 그를 살려준 게 바로 이 산책길의 나무들이었는데, 정작 이사를 해놓고 보니 바로 그 나무들 옆이어서 곰솔 할배와 푸조나무 할매가 자신을 불러들인 것 같아 반갑고 고마웠다. 푸조나무(천연기념물 311호) 검은 밑둥은 헐벗은 이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으로,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껴안을 정도로 덩치가 크다. 수백년 세월을 버텨온 그 나무의 밑둥은 검고 헐벗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초록의 이파리로 은성하다.

“잎 하나 피우는 내 등 뒤로/ 한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잎 하나 떨구는 발꿈치 아래/ 한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번은 당신 남의 님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오늘 연초록 벌레로 오신 당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잎-푸조나무 아래’)

노래로도 만들어졌다는 푸조나무 연작 중 하나인데, 생의 결절을 지나와 초록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변모가 상징적으로 채색된 시편이다. 그가 누워 있는 사철나무를 본 건 같은 길을 3년이나 산책한 뒤였다. 어느 날 시인의 눈에 쓰러진 채 옆으로 자라고 있는 오래 된 나무가 들어왔다. 늘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쓰러짐은 절망이지만, 직립의 숙명으로 서 있는 나무의 쓰러짐은 시인에게 오히려 새로운 곳을 향한 갈망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이런 절창을 건졌다.

“내 머리맡 어디쯤 쓰러져 크고 있는 사철나무를/ 와목이라 이름 붙였다/ 기울어진 나무는/ 자기를 슬며시 쓰다듬고 가는 여인에게로 기울다가/ 행장 챙겨 무작정 따라나서기도 하다가/ 저렇게 호된 회초리를 맞고 쓰러졌을 것/ 위로만 바라보아야 할 본분을 잊고/ 옆으로 옆으로 한눈 판 죄를 벌하려고/ 하늘이 나무의 다리몽둥이를 꺾어어놓았을 것// 그러나 그때/ 나무를 쓰다듬고 간 그 여인은/ 먼 여정에 눈앞이 아득해져/ 잠시 손 짚어/ 찰나를 쉬었다 갔을 뿐”(‘수영성 와목臥木’)

한때 누워서 살아야 했던 소년시절 그의 모습과 흡사했다. 나무가 누워 있어도 가지는 해를 향해 위로 자랄 성싶은데, 이 나무의 가지는 몸체를 따라 옆으로 퍼져나갔다. 스쳐간 여인의 숨결과 살결 때문이었을까. 늘 서 있어야만 하는 숙명을 뿌리치고 그녀가 간 곳을 향해 몸을 기울인 나무의 순정이 아프다. 그 여인, 잠시 손을 짚어 찰나를 쉬었다 갔을 뿐인 것을. 수영성 돌아 나와 ‘팔도시장’으로 들어섰다.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 장에 오백 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는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 원// 그것을 입 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 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본전 생각’)

수영 공원을 지나 늘 산책하는 시장 골목을 다 지나올 무렵 시인은 소설가 아내 조명숙(51)에게 전화를 걸어 시장 인근 호프집으로 나올 것을 청했다. 시인은 다시 후배 문인 강동수(48·국제신문 논설위원)를 청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집 ‘몽유시인을 위한 변명’을 펴냈던 강동수씨가 먼저 나타났다. 중년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소설을 향한 고되고 벅찬 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15년 전 대면했던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 글품으로만 먹고 살아온 가난한 부부인데도 뒤이어 등장한 시인의 아내는 얼굴이 더 맑다. 소설가 아내에게 시인 남편의 어느 작품이 가장 좋더냐고 물었더니, 다른 시인들은 이미 여러 편을 썼다는데 최근에서야 겨우 한 편 써놓고 흥분해서 보여주었다는 시 한 편을 언급했다. 그 시, 참 좋다.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쑥국-아내에게’)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최영철 연보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4년 ‘지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연장론’ 당선
●2002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족사진’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그림자 호수’ ‘호루라기’, 산문집 ‘나들이 부산’ ‘우리 앞에 문이 있다’, 어른 동화 ‘나비야 청산 가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