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송 동시 - 제 16 편] 꽃씨와 도둑
- 피 천 득
가진 건 꽃과 책뿐… 도둑이 깜짝 놀랐네 - 피 천 득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1997)
- ▲ 일러스트 윤종태
이 시의 화자는 도둑이다. 도둑이란 초대받지 못한 자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방문은 그의 몫이다. 이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방문한 집에는 훔칠 게 없다. 마당엔 꽃이 만발하고 방안엔 책이 가득하다. 그리곤 그만이다! 어쩌겠는가. 가을에 다시 와서 꽃씨나 가져갈밖에.
1910년 5월 29일 오늘, 이 시의 저자 금아 피천득 선생이 태어났다. 금아의 영결식이 있던 날도 작년 이 날이다. 2007년 5월 25일 세상을 뜨기까지 선생은 만 97년을 우리와 함께했다. 이 기간에 그는 수필 〈인연〉의 저자로, 또 셰익스피어 소네트 번역자로, 그리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생산해낸 시인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 그는 무엇보다도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나의 사랑하는 생활〉)고 고백한 '일상의 성자'이기도 했다.
이 시에서도 그의 '소박한 탈속의 경지'는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편이다. 그는 도둑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마당의 꽃과 서재의 책들뿐이다. 도둑으로선 이런 종류의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다. 그런데 이 경이는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억압하거나 무엇인가를 권위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능한 그것들과 멀리 떨어진 어떤 삶, 즉 천진한 유머와 아이로니컬한 농담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 연에서 도둑이 '가을에 다시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겠다'고 의뭉스럽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라. 아마도 이 유머와 농담은 선생의 삶을 특징짓는 어떤 선적인 경지 같기도 하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너"(〈너〉)라는 시가 잘 보여주듯 그에게 삶은 눈 쌓인 가지에 앉았다가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가는 아득함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남긴 것은 사랑하는 딸 서영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 난영과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이 다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면/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 그립니다// 집과 자동차를 작게 그리고/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 그립니다// 아빠의 눈이 시원하라고/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 그립니다"(〈그림〉). 단지 '넓고 푸른 하늘'이면 족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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