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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17> 김명인의 ‘너와집 한 채’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4. 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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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17> 김명인의 ‘너와집 한 채’
몇만리를 흘러온 것 같은… 인생의 가을에 서서
붉은 낙엽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 시인이 태어난 마을에 해가 진다. 서울에서 오전부터 내내 달려온 길, 예전 같으면 1박2일 걸려 여행하듯 내려와야 했다는 울진 후포항에 해가 지고 있다. 동해 너머 일본 쪽으로 빠져나간 태풍 때문인지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고 항구 뒤쪽 산맥 너머로 숨을 깔딱이며 넘어가는 해가 마지막 빛을 그 구름들 사이로 쏘아올려 희미한 빛이 포구의 물 위에서 여리게 놀고 있다. 맑은 날 같았으면 김명인(63) 시인, 그의 시처럼 하늘과 바다에서 “불의 허기로 긋는 성호(聖號)!”를 그리는 ‘장엄미사’가 봉헌될 시각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경북 울진 후포항 일몰 앞에 선 김명인 시인. 그는 “나는 시를 통해서 가야 할 포구 어딘가 아득히 깜박거리는 불빛을 본다”고 썼다.
    오징어배가 새벽에 들어오면 서둘러 선창으로 나가 생오징어를 오백 두름이나 받아다가 나흘에 걸쳐 배를 따서 말렸던 어머니. 그 곁에서 하릴없이 오징어 창자들을 만지며 푸른 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시인. 그가 이 공간을 벗어나는 길은 산맥을 넘어가거나 바다로 나아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어번기’를 맞아 학교가 쉬자 그는 울릉도 쪽으로 나아가는 오징어잡이 배에 올랐다. 일찍이 이 길을 택한 동년배들은 이미 바다에 익숙해져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바다 쪽 탈출구를 곁눈질해본 것인데, 그는 오징어들과 겨룰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미에 시달려 선실에서 초죽음 상태로 누워 있었다. 간신히 기운을 차려보니 모든 작업을 마치고 귀항하는 뱃전 너머로 후포항이 내다보였다. 그의 인생길이 바다 쪽으로 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다. 이제 산맥을 넘어가는 일만 남은 것인데, 그때까지 그에게 공부는 관심 바깥에 있었다.

    아버지는 해방 전 일본에서 염색업을 하다가 귀국해 고향에서 징용을 피해보려고 광산을 벌였지만 이후 전쟁통에 본인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형제와 누이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비극을 겪은 이후론 망연자실, 생업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이후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어머니는 바깥으로 떠돌았고,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바닷가 밭고랑을 오르내리며 신음 같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시인은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가 밭둑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그 탄식 같은 서글픈 노랫가락이 시인의 모두 시의 배후에 깔리는 기조음이 된 것일까.

    “바람이 쉬임 없이 모래를 퍼나른다/ 떼지어/ 낮게 지붕을 타고 흐르는 물새들/ 결심은 이내 어두워지고 저 젖은 바다의 힘줄에/ 모든 것은 또한 감길 뿐/ 우리들은 묶여 있다 이물을 서로 대고/ 굳게 묶여서/ 빈 배처럼 다정하게 흔들린다// 이 바닥을 떠날 수 있을까/ 살갗에 깊이깊이 찔려오는 낚싯바늘이/ 마침내 조금도 아프지 않다/ 어깨엔 온통 새겨지는 문신 서른 번/ 더는 털었던 빈 손 위에 식솔을 감아주며/ 영동은 또한 저물고 있다”(‘영동행각 2’ 부분)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태풍의 여운에 시달리는 바다가 길 위까지 거센 파도를 넘겨 보냈다. 서둘러 와이퍼를 작동해보지만 바다의 요동이 심상치 않다. 일행은 그날 밤 식사를 마친 후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낚시에 일가를 이룬 김명인 시인과 방파제 안쪽, 태풍을 피해 서로 이물을 맞대고 삐걱거리는 배들 사이에서 밤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방파제 바깥에선 전속력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부딪치는 파도들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멀리서 함포사격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래서 전쟁통에 포화를 피해 먹을 것을 낚아야 하는 것 같은 간절한 심정마저 슬며시 돋아날 정도였다. 이물을 맞댄 배들은 끊임없이 삐걱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시인은 지난 시절 서로 굳게 묶인 배들을 보면서 ‘이 바닥’을 떠날 결심을 해보아도 “젖은 바다의 힘줄에 모든 것은 또한 감길 뿐 우리들은 묶여 있다”고 탄식했다.

    그는 결국 동네 형과 함께 서울로 무단 상경해 산맥을 넘는 탈출을 시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대학에, 그것도 고려대 국문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조지훈 선생의 수업을 듣다가 자작시를 내놓으라는 숙제에 임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고 고대신문 문예상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신춘문예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정한숙 선생의 수업에 문제가 생겨 졸업이 제때 힘들어지자 자원입대를 신청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졸업 처리가 된 것을 알고 동두천에서 짧은 교사 생활을 하다 입대했다. 그 시절 미군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그 동두천은 그가 베트남까지 다녀와 제대한 후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의 길로 나선 뒤 낸 첫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동두천1’ 부분)

    더러운 그리움은 눈을 녹여 눈물을 만들고, 그 눈물을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했다. 방파제를 넘어온 바람이 허술한 옷차림을 비집고 들어와서 자동차로 대피해 바람 소리를 경청하는 중인데, 바람 사이로 비명 같은 함성이 들려온다. 서둘러 나가보니 일행 중 한 명이 태풍을 피해 방파제 안쪽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피난 온 농어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프로 낚시꾼으로 소문난 시인은 팔뚝만 한 황어를 들어올리다 아쉽게도 낚싯대를 부러뜨렸다는 전갈이다. 일행에게 방파제 안쪽의 밤낚시야 농담 같은 유희이지만, 바닷가 사람들에게 바닷속 물고기들과의 싸움은 생존의 밧줄을 목에 건 사투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는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 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둣빛 흐린 물결로 내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바닷가의 장례’ 부분)

    일행 중 한 명이 어두운 바닷가에서 랜턴을 밝혀놓고 농어에 칼질을 하는데, 시인은 횟감에 아랑곳없이 삐걱거리는 배 위에서 부러진 낚싯대를 치우고 새 낚시를 드리운 채 검은 바다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녕 고기를 잡기 위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저리 묵언 수행을 하는 것일까. 다음 날 아침 태풍에 쫓겨온 고기들이 후포항 앞바다 정치망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려들었던 모양이다. 새벽부터 포구가 부산하고, 근래 보기 드물게 만선을 이룬 배 주변에서 서로 생오징어를 더 많이 받아가려는 아낙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가을 아침 해가 따갑게 선창을 비추는 가운데 시인이 50여 년 저쪽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행했던 그 작업과 한 치도 틀리지 않은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천천히 배회하는 시인의 표정이 미묘하다.

    “한 生을 바꿔놓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라도/ 남해 먼 섬이나 그보다 더 아득한/ 열대해쯤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물밑 사정/ 땅 위에서는 짐작이 안 되지만/ 일렁이는 수면과 속의 해류/ 사이로 펼쳐지는 물고기들 고달픈 접영,/ 버터플라이로 더듬어 온/ 몇 만리 유목이 흐르는지,// 보이지 않는 물밑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버터플라이’ 부분)

    몇 만 리나 흘러온 것 같은 생의 유목(遊牧). 생이 늘 보랏빛 등꽃처럼 늘 환한 것만은 아니어서 구비마다 모퉁이마다 곡절도 많았을 터인데, 시인은 그 우회로를 어떻게 돌아나와 이제 전생처럼 펼쳐지는 후포항 오징어들 곁에서 한가롭게 가을볕을 쬐는 중인가. 30여 년 전 사귀었던 여인이 근년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고, 후포항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시인은 말했다. 피차 환갑이 넘었을 나이인데, 시인은 끝내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달디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져내리면”(‘등꽃’) 세월도 희미해지고 분분히 흩어진다. 그리하여 이제 할 수만 있다면, 등 뒤로 따라오는 모든 길은 지워버리고, 깊은 산골 너와집 한 채로 서서, 인생의 가을, 떨어지는 붉은 낙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은 게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너와집 한 채’ 부분)

    그는 다음 주에 나올 아홉 번째 시집 ‘꽃차례’(문학과지성사)의 자서에 “마당가 벽오동 아래 평상(平床)을 펴고 설핏 낮잠 들었는데, 꿈길 따라나선 잠깐이 일생이 되었다”고 써 넣었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김명인 연보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출항제’ 당선
    ●시집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바다의 아코디언’‘파문’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고려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