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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19>문정희 ‘물을 만드는 여자’
사랑의 도가니서 냉탕으로 던져진 소녀
이순을 넘긴 지금도 그 그리움 찾아 떠돌아
이순을 넘긴 지금도 그 그리움 찾아 떠돌아
관련이슈 :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 아들이 재수 끝에 수능시험을 본 다음날, 문정희 시인과 함께 그의 고향 전남 보성으로 떠났다. 성장기에는 그냥 아내에게 모든 걸 맡겨 놓았는데, 그 아내마저 직장 일로 동분서주했고 나는 나대로 아내에게 양육의 부담을 넘겨 놓았다고 방심했는데, 막상 결과를 보니 씁쓸했던 것이고, 그래서 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서 재수를 은연중 권유했던 것인데, 그 일 년의 세월은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찾아올 만큼 쓸쓸하고 아픈 기간이었고, 결과야 모르지만 어쨌든 아들이 마라톤 도착지를 통과하고 난 다음날 문정희 시인과 떠나게 된 여정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추렸던 문정희의 시 ‘아들에게’가 그리 전율로 왔을 것이다.
◇비 오는 고향 땅 보성 차밭의 문정희 시인. 그는 “나에게 고향은 느꺼운 사랑과 기묘한 슬픔이 혼재된 유토피아이자 세상의 끝”이었다고 술회했다.
시를 향해 가는 길은 일면 운명적이기도 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인 자들은 무당의 업보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그 굴레 안에서 그나마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지난한 여로인 것 같다. 시인 문정희(62)씨. 그의 시는 대부분 직정적이고 솔직하며 뜨거운 편이다. 관념어로 포장하고 기교로 우회하며 알 듯 모를 듯 여백을 남기면서 세련되게 달아나는 시들과는 차별화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러브호텔’ 부분)
◇문정희 시인이 고향을 떠날 때마다 들렀던 간이역 ‘명봉’. 봉황이 운다는 그 역을 떠나 남광주역에 도착할 때까지 시인은 내내 울었다.
그는 한마디로 사랑 속에서 태어났고 그 사랑의 도가니에서 살다가 어느 날 냉탕으로 던져진 존재였다. 정확히 ‘냉탕’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모든 배려는 어느 정도 작동했겠지만 상대적으로 그 전에 받았던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상태여서 충분히 그리 느낄 만한 조건이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에서 두 오빠아래 태어난 막내딸이 그이였는데, 지역 유지였던 부친 문사빈은 느지막이 본 막내딸을 막무가내로 사랑했다. 머슴들에게 업혀 두 시간씩이나 가야 했던 노동국민학교 대신, 집 앞에 그 학교의 분교 ‘명봉분교’를 세워 딸을 그리 보내다가 4학년 때 눈물을 머금고 광주로 유학 보냈다. 이때부터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단절된 딸 문정희의 감성에 자동적으로 시심이 싹트기 시작했던 걸까. 전남여중 1학년에 입학했다가 서울로 유학해 진명여고를 졸업하는 내내 문정희는 전국 문예백일장 20여개를 휩쓰는, 기네스북에 올릴 만한 기록을 내면서 승승장구했고, 동국대 문예백일장 심사를 맡았던 미당 서정주의 눈에 띄어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미당은 정희의 국어선생에게 “어쩌문 이리 잘 쓰는 아그가 있냐 이?” 하면서, 그네가 동국대에 꼭 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문정희는 동국대 국문과에 갔고, 이미 고등학교 때 첫 시집을 미당이 작명한 ‘꽃숨’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던 그는 미당이 작고할 때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이후 남들이 하는 것처럼 결혼도 했고, 1남 1녀도 낳았다. 하지만 이 범상치 않은 시인에게 결혼이라는 제도와 탯줄로 이어진 새끼들과의 한 생은 그대로 시의 강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가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남편’)
그는 데뷔 7년 만에 현대문학상을 받았는데(당시 규정으로는 데뷔 10년차 이후에만 주는 상이었지만 최인호와 그가 예외적이었다) 이후 1980년대 초반 뉴욕으로 떠나 2년 동안 종교철학을 공부하는 와중에서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이 과정이 후일 그의 국제적 시 감각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계기가 된 건 맞지만, 교사생활을 팽개치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떠나온 유학길은 고통 그 자체였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물리적인 고통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해야 했던 그의 자유분방하고 뜨거운 기질이 더 큰 문제였던 것 같다. 그는 결혼이야말로 ‘분쟁지역’이라고, 지난달 이스라엘에서 초청한 문인대회에 다녀오면서 썼다. 이른바 ‘분쟁지역 문인들’을 초청한 자리였는데 문정희는 “내 평생 DMZ를 두 시간 이내 거리에 거느리고 살았지만 기실 나는 결혼이라는 분쟁지역에서 내내 살았다”고 메모했다고 했다. 아무리 그러해도 이러저러한 그의 시는 결혼생활에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은 아닐는지. 하지만 문정희는 남편이 ‘남편’이라는 시를 다른 이에게 전해 듣고 남편을 아내로만 바꾸어 읽으면 딱 내 심정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전했다. 그는 갈수록 그이가 편안해진다고도 설핏 말했다.
“꽃아,/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제/ 그 모습은 무엇이었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붉은 입술과 향기/ 오늘은/ 모두 사라지고 없구나/ 꽃아,/ 그래도 또 오너라/ 거짓 사랑아”(‘오라, 거짓 사랑아’)
오라, 거짓 사랑아! 우리는 비오는 날 광주에서 차를 빌려 보성까지 달려 내려왔다. 보성의 상징인 차밭에 들렀는데, 푸르른 차 밭둑 사이를 오르는 내내 비는 그치지 않았는데, 시인은 우산을 받쳐 들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비 내리는 차밭을 떠나 율포 해변으로 갔다. ‘율포의 기억’이라는 시편이 탄생된 시인의 외가쪽 배경인데, 여전히 비는 내렸고, 그래서 시인은 우산을 쓰고 뻘에 나아가 포즈를 취했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스케줄이었고, 별 감흥도 따르지 않았으나, 다음날 우리가 시인의 고향역 ‘명봉’으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따뜻하게 행복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명봉역을 떠나 광주까지 갈 때면 늘 몇 개의 역을 지날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소녀. 받은 사랑이 무한대일수록 그 사랑이 두고두고 짐이 된다는 사실은 그런 사랑을 받아본 이만 알 게다. 더욱이 그 사랑, 순식간에 거두어진 것이라면, 또, 어찌할까. 문정희 시의 중심은 이 지점에서 촉발됐고 이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그리움을 해결하지 못해 떠도는 형국은 아닐는지. 그이는 더 깊어진 공부와 상념으로 스스로 시를 제어하려는 듬직한 포즈를 취하지만, 그 무슨 상관이랴. 보성의 러브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시인이,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 러브 현장을 답사한 그네가, 딸들에게 썼던 시편을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는 쾌락과 자조와 비하의 편이 아니라 대지와 생명과 삶의 편이기 때문인 것이다.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물을 만드는 여자’)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문정희 연보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서울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9년 ‘월간문학’에 시 ‘불면’ ‘하늘’ 당선 ●레바논 ‘나지 나만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시집 ‘꽃숨’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아우내의 새’ ‘그리운 나의 집’ ‘찔레’ ‘남자를 위하여’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수필집 ‘사색의 그리운 풀밭’ ‘우리 영혼의 암호문 하나’ ‘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것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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