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그림♠음악♠낭송 시(詩)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0> 조정권 ‘산정 묘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4. 10. 07:31
728x90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0> 조정권 ‘산정 묘지’
달이 아닌 죽음을 맞던 山頂의 독락당 대월루…
천상의 누각을 꿈꾸며 절대 고독을 즐기다
  • 그를 만나고 온 시간은 꿈같다. 꿈처럼 황홀하다는 의미보다는 순간처럼, 희미했다는 맥락이다. 과연 만나기는 한 건지, 사진을 보면 분명하게 증명되긴 하지만 그를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늘 1박2일로 시인들과 함께 시의 공간으로 다녀오면서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정이어서 그 이야기들 중 몇 토막만 떼어내도 충분히 이 공간을 메울 수 있었는데, 그이와는 상대적으로 너무 짧은 순간 만났다 헤어졌다. 게다가 그는 일상의 공간보다는 눈보라치고 쩡쩡 얼어붙은 저 높은 산정(山頂)을 탐한다. 심지어는 일상의 바깥으로 난 모든 길을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그이다.

    ◇불암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스며들기 전, 석양이 시인의 얼굴을 음양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까마득한 벼랑 끝에 살면서 내려가는 길을 스스로 부셔버리는 시인의 삶은 오늘날 불가능해보인다”면서도 “세상과 절연된 통화이탈지역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존재적 곤경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심리는 존중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독락당’)

    사실 ‘독락당 대월루’는 조선 선비 이연적이 경주 근처 시냇가에 지어놓은 작은 정자에 불과하지만 시인은 그 정자를 일상의 벼랑 끝에 올려놓았고, 내려오는 길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그러고도 ‘독락’(獨樂)이라니, 비장하다. 그이가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산정묘지’ 연작을 쓰기 시작할 때도 이리 심각했다. 독락당 대월루는 그의 마음 속 벼랑에 지은 상상의 집이었고, 한자 그대로 ‘홀로 즐거움을 누리는 집’이 아니라 ‘홀로 절망하던 침대’, ‘달을 맞이하는 누각’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서재’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는 그 마음속 벼랑 끝에서, 이 시를 쓰고 나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1987년 ‘산정묘지’ 연작 1번을 썼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孤湧?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산정묘지 1’ 부분)

    이렇게 조성하기 시작한 저 높은 산정의 묘지는 이후 5년에 걸쳐 150편까지 이어졌다. 돌이켜보건대 1980년대는 문학이 투쟁의 수단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미학적으로 투박하고 어설퍼도 대의에 복무할 수 있다면 용인되던 문학이 생산된 건 어쩔 수 없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이른바 ‘순수’라는 미명으로 현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음풍농월을 하는 부류로 배척당하는 그룹도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지원을 해야 하는 문예진흥원 기획관리실장으로 20여년을 근무한 그이고 보면, 두 그룹의 첨예한 대립은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현장에서 충분히 느꼈을 법하다. 그는 이 시점에서 문학적 야심을 품었다고 했다. 이른바 ‘순수’와 민중시를 봉합하고, 그 둘을 합쳐서 승화시킨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결과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것이 ‘산정묘지’ 연작이었다.

    ◇불암사 연못가에 앉아 조정권 시인이 슬며시 미소짓는다. 누군가는 그를 ‘수성’(水性)의 시인이라고 칭했는데, 산과 물은 통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산정묘지 1’ 부분)

    조정권(60) 시인, 그를 만난 곳은 태릉 육군사관학교 정문 앞이었다. 월계역 부근에 살면서 산책 코스로 애용하는 불암산이 그곳에서 가까웠다. ‘산정묘지’는 ‘언어로 등반하는’ 공간이어서 딱히 특정 무대가 있을 수는 없지만 시인이 늘 산책하듯 오르내리는 불암산이 자연스레 간택되었다. 그는 인왕산 아래 냉천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서울을 떠나본 적 없어도 도심에 살면서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 수락산, 이른바 서울 4대 산을 쉼없이 오르내린 ‘서울 산사나이’다. 이순을 넘어선 나이에도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단아하게 각진 얼굴, 맑게 빛나는 눈빛이 스스로 청한 산정의 고독을 닮아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의 엄숙한 표정을 풀고 싶어 “지금도 아름다운데 젊은 시절에는 여인들이 많이 따라다녔겠다”고 쓸데없이 농담을 해도, 그는 쉬 요동하지 않았다.(그는 나중에 자신의 1인 종교에는 여인이 낄 틈이 없다고 했다. 1인 교주이자 1인 신도인 그 ‘외로움’이라는 종교에는…)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는 칩거한 방의 모든 창문을 밀봉하고 두꺼운 커튼을 내린 채 “지금까지는 살기만 했지만 이제부터는 쓰기만 하겠다”고 선언한 뒤 하인이 들이미는 진한 커피와 빵 몇 조각으로 연명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다가 죽었다. 그이 또한 산정묘지를 쓰고 난 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까지 살아 있다.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물론 프랑스에서 이 시로 인해 각광받았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문학면에 톱으로 그의 기사가 실린 것 외에도, 프랑스 시 전문 계간지 ‘포에지’ 1999년 한국 시인 특집호에 실린 그이의 ‘산정묘지’를 읽고 프랑스 원로시인 필립 자코데가 출판사를 통해 팩스로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 시를 읽으면서 감명을 전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시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지금처럼 나의 내부가 위기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이런 우연한 만남으로 내가 얻은 힘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꺼내자, 프랑스에는 은둔하는 시인들이 많다면서 ‘산정묘지’의 절대고독이 그의 고독을 위로해준 것 같다고 부연했다. ‘산정묘지’가 불어로 번역돼 각별히 그곳 독자들에게 각광받은 덕분에 그는 2006년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외무성이 특정하여 초청한 보르도대학 강연에서 ‘높이의 시학’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서양에는 깊이는 있을지 모르나 그 깊이와 넓이를 포괄하는 ‘높이의 시학’은 없다고 설파했다. 그는 “동양에서 마음은 넓이의 세계였다면 높이는 정신의 세계였다”며 “시간의 고요가 깃든 험준한 봉우리를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경험은 삶의 물음에 대한 방향으로 틀을 잡을 때 경건하고 숭고한 정신의 표상으로 나타난다”고 연설했다.

    “地上에 비내리고 山頂엔 눈내린다/ 눈은 어찌하여 地上까지 오기 꺼리는가/ 산봉우리에 학처럼 깃들고 싶은/ 저 뜻 숨기기 위함인가”(‘산정묘지·22’)

    8남매,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정권 시인. 아버지가 남대문에서 금은방을 경영해 그의 성장환경은 유복했다. 누님들이 ‘빨강머리 앤’ 같은 책을 만날 읽고 지내 그 영향을 받았고, 서대문 길가로 나오면 리어카에 안 팔리는 시집은 물론 다양한 소설이 실려 있어 늘 책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양정고등학교 시절 김상억 국어선생에게 ‘찍혀’ 문예반에서 활약하기 시작했고, 양정 보성 중앙 배제 같은 사립명문고에다 진명 숙명여고까지 가세한 문학축제에 늘 박목월 선생이 참가했는데, 그의 자질을 눈여겨본 목월의 추천으로 대학시절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문학소년’ 시절은 길었지만 불행하게도 ‘문학청년’ 시절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백일장에서 그가 상을 타오면 집어던지면서 법대를 가라고 강요했지만 허사였다. 그 부친은 법대도 안 간 ‘시 쓰는 아들’의 부양으로 지금도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95세의 노익장이다.

    그가 김달진(1907∼1989) 시인을 만난 건 그의 시사에 절대적인 사건이었다. 선시와 한시에 능통한 그 ‘영감님’의 시집이 나왔을 때 우연히 한 매체에서 서평을 부탁받아 쓰게 되면서 1984년 처음으로 그이를 만났는데, 조정권은 김달진의 선시풍 삶과 시에서 특별한 감응을 얻었다. 김달진옹이 작고할 때까지 술을 주고받으며 어울리다가 그는 ‘영감님’의 정신세계를 딛고 올라 ‘산정묘지’에 이르게 된 거였다. 달진옹에게 헌정한 ‘허심송’이란 시집에 ‘겉늙은’ 시를 쓴다는 비판이 날아들자, 그는 아예 작심하고 ‘산정묘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양정신과 훨덜린을 흠모하던 서양 감수성이 결합하여 ‘산정묘지’의 정신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20여년 봉직했던 직장에서 나와 고독하게 살고 있다. 문예진흥원에 다닐 때조차 늘 집과 직장만을 오가는 스스로 고독한 사내였다. 불암산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와 월계역 그의 집 부근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절대 외로워야만 시를 쓸 수 있다”면서 “시가 성장하는 그 장소, 외로움은 내가 1인 신자이면서 1인 교주인 내 종교!”라고 그는 역설했다. 바깥으로 난 모든 길을 없애버린 속세의 ‘독락당’ 시인. 그는 ‘산정묘지’를 쓰는 내내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음악을 암보해서 연주한 맹인 헬무트 발햐의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공간’지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음악은 물론 미술평론까지 넘나들었던 , 입체적이고 건축적인 언어를 구사한다고 상찬을 받는 그이와의 만남은 너무 짧았다. 외로워 보였지만 쓸쓸하진 않았고(집에 돌아가면 소월문학상, 김수영 문학상을 탈 때마다 그 상금으로 바꾼 영국제 엠프 ‘QUAD’ 시리즈로 중세의 종교음악을 들을 터이니…), 석양에 비낀 얼굴이 파인더 속에서 아름다웠다. 그래도 어딘지 허전했는데, 굳이 외로움이 그의 종교라면, 어울리지 않을 것도 없겠다.

    “새로 바른 국화무늬 봉창가로/ 밤새 내리는 싸락눈./ 창 열고 먼 하늘 잡목숲/ 바람 지나다니는 소리 귀 쏘인다./ 멀고 아득해라/ 天山의 눈 밤새 밟고 걸어다닌 사람들.”(‘싸락눈’)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산정묘지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중략)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조정권 연보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영어교육과 졸업
    ●1970년 ‘현대시학’에 시 ‘흑판’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 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떠도는 몸들’ 등.
    ●녹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