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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 동시 - 제 20 편] 소년 /윤동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4. 1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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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 동시 - 제 20 편] 소년
윤 동 주
'사랑처럼 슬픈' 소년의 초상화
신수정·문학평론가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1939)

▲ 일러스트 윤종태

젊어서 죽은 자는 결코 늙지 않는다. 남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은 언제나 청춘이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던 일본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외롭게 죽어간 윤동주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체포된 지 19개월 2일 째였으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서시〉)고 노래한 지 3년 3개월 남짓 뒤였다.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 연희전문과 일본 교토의 릿쿄대학, 도지샤대학 등에서 공부를 한 그는 죽는 날까지도 '학생'의 신분이었다. 사회인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궂은 비 내리는 가을 밤/ 벌거숭이 그대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그리고 서서/ 아인 양하고/ 솨-오줌을 싸오."(〈가을밤〉)하고 노래한 '개구쟁이'였으며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라고 결의를 다진 '의혈청년'이었을 뿐이다.

이 '개구쟁이'와 '의혈청년' 사이에 '소년'이 있다. 소년은 단풍잎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날,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 소년 화자는 우리 시가 마련하고 있는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영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의 손바닥으로 맑은 강물이 흐르고 또 흐르겠는가.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날 정도로 그의 영혼은 청신하고 해맑다.

그러나 이 '맑음'만으로는 이 시의 '황홀한 슬픔'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라고 노래한 〈눈오는 지도〉를 겹쳐놓으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이 시에 따르면 조만간 순이는 떠나고 소년은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이 상실의 미래가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홀히 눈을 감는" 소년의 모습에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그것은 훼손되기 일보 직전의 아슬아슬한 미라고 할 만하다. 불안한 아름다움, 그것이 소년이다.

이 '사랑처럼 슬픈' 소년의 초상화는 윤동주가 그려 보인 우리 시의 새로운 경지다. 그는 이 보물과 더불어 스스로 모가지를 드리운 채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힌 소년이 되었다. 이제 참회는 어쩌면 우리 몫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