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흥사지>2010-05-02
<▲중흥사터에 산수유>2010-05-02
<▲터만 남아 있는 중흥사지>2010-05-05
중흥사는 고려 전기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말기에 고승 보우가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이 절은 본래 30칸 정도의 작은 규모에 불과했으나 숙종 39년(1713) 외적에 대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서 숙종 41년(1715)년에 늘려 지어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8도의 절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번갈아 의승을 뽑아서 산성내의 절에 주둔시켰다.
승군들이 주둔하였던 용암사, 노적사, 경흥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중흥사을 관리하였던 중요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여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있다.
북한산 노적봉(露積峰) 아래에 있었던 사찰로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 고승 보우(普愚)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절이 대규모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고 난 후 도성의 방어를 위해 외곽에 대대적인 축성을 하여 북한산성을 완성한 숙종(肅宗) 39년(1713)이후다. 축성 당시에는 30여 칸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136칸의 대찰(大刹)로 증축이 이루어졌다. 성내에는 성을 지키기 위한 승군(僧軍)이 주둔하였는데 중흥사는 승군이 주둔하였던 북한산성 안의 11개 사찰을 관장하는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왕실에서도 8도의 사찰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교대로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하고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道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중흥사는 승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그리고 이들 승병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僧倉)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승영 당시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萬歲樓)와 나한전(羅漢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여 지금은 옛터에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
[출처] 시도기념물 제136호(경기) 북한산중흥사지(北漢山重興寺址)|
<▲중흥사터에 산수유>2010-05-02
<▲중흥사 임시 법당>2010-05-02
<▲ 천해대에서 바라본 증흥사지/의상능선의 봉우리(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와 오른쪽은 원효봉>201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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