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기도를 한다. 아버지가 근엄하게 주기도문을 외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자 아들이 재빨리 덧붙인다. "일용할 버터도 주옵시고…." 하느님의 입장에선 누구의 기도가 사랑스러울까?
이 시의 화자도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 그는 '일용할 양식'에 이어 '버터'까지 달라고 했던 아들처럼 '때맞춰 비를 내려주신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한편, '개미네 마을'은 그냥 두라고 요구한다. 비 때문에 개미네 집이 무너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이런 주문을 넣을 정도라면 그의 하느님이 단순한 경배의 대상이기만 할 리가 없다. 그의 하느님은 분명 일용할 양식과 더불어 그 빵에 발라 먹을 버터마저도 내려주실 분임에 틀림없다.
박두순(58)은 1977년 등단한 이래 8권의 동시집을 펴내기까지 일상에 만연해 있는 이 '하느님', 즉 우주적 조화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묘파해온 시인이다. "여기도 하느님 마을 한 귀퉁이/ 흙마당에 봄비가 다녀가고 있다/ 몇 개 발자국들도 다녀갔다, 누구의 것일까// 하느님은 발자국 깊이를 보고도/ 이 세상 마당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안다// 마당을 나서는 우리 일행을 보고/ 너희들이구나 하며/ 후박나무 옷섶의 빗방울을 내려/ 어깨를 툭툭 쳤다// 하느님이 오늘 보신/ 내 발자국은 어떨까."(〈마당-송광사에서〉)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 내린 다음날의 산사 마당에 찍힌 발자국들이나 느닷없이 빗물을 떨어뜨리는 후박나무 이파리 등은 그에겐 도처에 깃들인 하느님의 정령들이다.
그는 시인이란 무릇 누구보다도 먼저 이 우주적 정령을 알아보고 그와 더불어 자기 내면을 갈고 닦는 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의 시들은 신의 섭리가 깃들인 자연과의 교감의 산물이자 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마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기사단의 고투에 다름 아니다. 늦은 밤, 창문을 열고 뜰을 훤하게 비추는 달을 바라볼 때, 그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달을 꼭 껴안았다/ 달도 나를 꼭 껴안았다"(〈달과〉). 이 시의 제목을 보라. 〈달〉이 아니라 〈달과〉다! 내가 달을 껴안았을 때, 달도 나를 껴안는 세계. 나와 달, 달과 내가 공존하는 세계. 이 물아일체의 황홀경을 위하여 우리는 '시'를 갈구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하느님에게 '개미네 마을'을 그대로 두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