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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 동시 - 제 37 편] 귀뚜라미 소리/방정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5. 28.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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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 동시 - 제 37 편] 귀뚜라미 소리/방정환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
장석주·시인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 일러스트=양혜원
소파 방정환(1899~1931)은 피로가 누적되며 신장염이 재발해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저승사람이 나를 데리러 왔어. 나는 이제 가네. 어린이들을 부탁하네"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방정환은 어린이와 뗄 수 없는 평생을 살다 갔다.

그는 정말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방정환은 잔물, 금파리, 북극성, 몽중인 등 아주 많은 필명을 썼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9개나 되는데, 아마도 그보다 더 많으리라 추정한다.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내며 글 쓸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자 잡지에 실을 글들을 혼자 다 썼는데, 글마다 다른 이름을 써서 필명이 많아졌다고 한다. 3·1운동 때 오일철 등과 독립신문을 등사로 찍어 배포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던 그는 1923년에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윤극영, 마해송 등과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의 인권과 이익을 키우는 일에 뛰어들었다.

〈귀뚜라미 소리〉는 쓸쓸한 정서로 물든 동시다. 이 동시의 배경은 조락과 결빙이 시작되는 늦가을이다. 눈이 내리고 천지가 얼어붙는 겨울은 생명을 가진 것들에게 어려운 시절이 될 것이다. 봄까지 버티고 견뎌야만 겨우 살아남는다. 그 시련 속에서도 산 것들은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는 가느단 소리다. 이 가느단 소리는 생명의 쇠잔함에서 나오는 소리다. 섬돌 밑이나 구석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는 어쩐지 일제의 지배 아래에 있는 조선 사람의 고단한 처지와 겹쳐진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는 운다.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납해야 하는 이 고난 앞에서 약한 것들은 그저 가느단 소리로 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 달은 얼어붙은 듯 파랗고, 오동잎은 뚝, 뚝 진다. 귀뚜라미 소리는 처량하다. 실은 귀뚜라미 소리가 처량한 게 아니고 그 소리를 처량하게 듣는 청자의 심사가 처량한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향한 시인의 연민과 지극함은 '울 밑 과꽃'이나 가느단 소리로 우는 '귀뚜라미'에까지 미친다. 과꽃이나 귀뚜라미는 널리 퍼져 있는 작은 것, 흔한 것의 표상이다. 그런 까닭에 늦가을 밤에 찾아와 귀뚜르르 귀뚜르르 우는 처사의 가늘고 쓸쓸한 소리는 주권을 빼앗기고 피동적으로 삶의 최소주의로 내몰려 가난과 시름 속에 사는 망국민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입력 : 2008.06.22 2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