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동그라미/이대흠 -어머니의 그륵/정일근 -의자/이정록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6. 2. 09:19
728x90


동그라미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
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
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
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
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
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에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 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시집『물 속의 불』(천년의 시작, 2007)



------------------------

어머니의 그륵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릇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시집『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과사상사. 2003)

나희덕 엮음『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삼인. 200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0909일 금요일

시집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3(국립공원, 2007)

나희덕 엮음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삼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