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추한 세상을 뒤로 하고 나타샤, 함께 산골로 가자
김선우·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 일러스트=이상진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눈은 내리고 연인이 있는 곳에도 연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릴 때 한 대책 없는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다. 그윽한 영상을 펼쳐 보이며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시는 두 번의 절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도입부에 단도직입으로 펼쳐진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단다!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다, 요샛말로 '자뻑'이 한참 심하다. '낙엽이 져요, 당신이 그리워요' 이게 순서 아닌가. 그런데 이 시는 대뜸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여 낙엽이 지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꽃이 핀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이토록 과장되게, 그러나 천진하고도 사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뿐이리라. 두 번째 절정은 3연. 산골로 도망가자고 연인을 꾀는 시인의 속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이니 일본제국주의 압박이 점차 수위를 높여갈 때다. 세상은 갈수록 추해져 가고, 우리는 더러운 세상에 섞여 살기 힘든 순결한 존재들. 그러니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려버리자고 이 시는 선동하는 것이다. 기막힌 사랑의 선동이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다. 상대를 단박에 무장해제시키는 철없고 순수한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만하지! 게다가 이 말은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에 살자고 하는 시인에게 나타샤가 응답하며 고조곤히(조용히) 속삭이는 말로 설정해 놓았는데, 묘하게 아련하고, 아프고, 캄캄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는데 도리 있나. 푹푹 내리는 흰 눈 속에 응앙응앙 울며 어서어서 흰 당나귀가 와야지!
이제 당나귀를 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언젠가 눈은 그치고 말 텐데! 더러워 버린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은 살아내야 하는 걸! 몽환적인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이 시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시 잘 쓰고 핸섬한 모던 보이 백석(1912~1995)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 중에도 통영 처녀 '란(박경련)'과 기생 '자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백석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전하는 자야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리 되었다.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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