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5] 저녁의 연인들 / 황 학 주
사랑은 회색 지대… 반은 낮 반은 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애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2006년>
▲ 일러스트=클로이
우리는 모두 저녁의 연인들이다. 가을의 연인들이고 나아가 밤의 연인들이 된다. 사랑은 회색 지대의 것이어야 한다. 어스름의 것이어야 한다. 반은 침묵, 나머지 반은 열기. 반은 정신, 반은 육체. 반은 낮, 반은 밤. 연인과의 사이에는 늘 저녁의 시간이 고이고 저녁의 육감이 지난다. 저녁엔 무모함이 가시고 명상이 오는 때, 하루의 그림자가 가장 길어서 나 자신을 나보다 더 멀리 나아간 그림자에게 포개어 보는 때다.
낮을 살고 나면 저녁은 연인처럼 찾아온다. 저녁이 머무는, 말하자면 연인이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주인공은 마당에 올리브나무 세 그루를 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무에 머무는 저녁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습해 달라고 할 참이고 인적 드문 곳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할 참이다.
그래서 올리브나무에 온 저녁은 화자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거지요? 나는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했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길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길이었습니다. 허리에 옹이가 박이도록, 발에 피(단풍물)가 나도록 당신을 찾아 헤맨 시간들을 두런두런 마당의 올리브나무는 말하는 듯하다. '역 광장'에서 '국수'를 먹던 '추운 세월들'도 이 올리브나무에는 와 있다. 아주 오랜 세월, 아주 먼 공간을 동시에 아우르며 찾아온 연인은 분명 육체적 연인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온통 정신의 고답을 강조하는 연인은 아니다.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이라고 범부의 일상을 제시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오래 살기'는 육체의 오래 살기는 아닐 것이다. 생의 비의를 제시하는 연인, 그렇게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연인은 어쩌면 먼 과거에 오래 함께 살던 사람이 시간이 되어 나타난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 먼 미래에 함께 하고 싶은 연인이 스치듯 현현한 듯도 하다.
황학주(54) 시인은 아프리카의 시인이다. 아프리카에서 오래 구호 활동을 해 왔다. 현지에서 사진을 찍어 사진을 곁들인 산문집도 냈다. 그런 어느 시간 그는 올리브나무를 만났을 것이다. "그토록 척박한 땅에서 놀라운 빛, 숨은 초록을 띤 올리브나무 고목들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내 마음의 연인이 떠올랐다. 내게 그녀는 올리브나무처럼 영적이고 생명력 있고 야생이며 자유이다. 아프리카의 올리브나무를 보자, 그녀가 내 생에 올리브나무로 들렀다는 생각이 들고 곁에 있지 않아도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계속 걸어가게 해주는 연료일 것이다. 그 먼 길은 분명 '벗은 발'로 걸어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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