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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경(完經)/김선우-완경(完經)/한선향-완경(完經)/윤영림/완경/황명자-만월/박이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8. 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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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경(完經)

 

김선우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고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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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경(完經)

 

한선향

 


날마다 내 몸 하구(河口)에선
붉은 꽃이 피었다
물큰한 갯내음 어머니의 몸 냄새
내 몸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풍광은
꽃으로 오기 전 봄 한나절을
누렇게 바래주고 있었다
내 갈비뼈 사이에서 돌연 서늘해지고, 달아오르고
까닭없이 웃음 터지는 그 모든 것들이


어머니의 또 그 어머니의 꽃 내림이
내 살집 속에서 시큼해질 무렵부터
꽃향기도 없이 만발한 화원엔
검불처럼 떨어지는 꽃자루 두엄처럼 쌓여
수십 개의 바늘꽃 피워낸다
이제 비릿한 갯내음으로 지워진 하구(河口)엔
적멸보궁의 고요, 선정에 든 와불
절 한 채 지어졌다

 

 

 

-시집 『비만한 도시』(작가콜로퀴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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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경(完經)

 

  윤영림

 


  시간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나 봐. 몸의 중심이 이리도 검붉은 걸 보면 무덤처럼 고요한 시간이 오고 있나 봐. 몸을 꽃잎처럼 열어둔 이때를 완경이라고 하나 봐. 내가 필 만큼 피었나 봐. 더 이상 피울 꽃이 없나 봐. 괜찮아. 몸져누울 일이 아니야. 몸속의 강물이 완전하게 지나가는 소리야. 눈부신 벽 하나 부시고 가는 거야. 물의 깊이보다 몸속이 더 깊었던 거야. 칼데라분화구로 휴식기에 들어가는 거야. 또 다른 진화를 위해 백악기로 돌아가는 거야.

 
 

-시집『구름해부학』(한국문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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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경(完經)

 
박연숙

 

 

빗방울 하나에도 범람하는
나에겐, 감람나무 잎새 내려놓을 내륙이 없다
마지막 빗방울은 발뒤꿈치거나
저 차디찬 달의 가장자리에서
놀란 듯 둥글었을 터
단 한 번 찡긋거렸을 뿐인데
잠속으로도 비가 온다, 나는
얇은 잠이 온통 젖어들며 수생식물을 키운다
느닷없이 발목을 저당잡힌
갈대는 빨대를 꽂고
한 모금 한걸음씩 늪을 빨아먹는다
쪽쪽 소리를 내며
갈대들이 부풀어 오른다
발뒤꿈치를 세우며 하얗게 재채기한다
둥글다는 것은 안쪽이 조금씩 허물리는 것
나는 그것을 달이라고 명명한다
수생이 젖는다,
온통 붉은 눈동자다


 

 

-문학무크『시에티카』(2010, 하반기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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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
 

박이화


 

누군가 한 달에 한 번

노을처럼 붉디붉은 잉크로 장문의 연서를 보내왔다

미루어 짐작컨대

달과 주기가 같은 걸로 봐서

멀리 태양계에서 보내는 것으로만 알 뿐
 

그때마다 내 몸은

달처럼 탱탱 차오르기도 하고

질퍽한 갯벌 냄새 풍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편지

찔끔, 엽서처럼 짧아지더니

때로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

아마 머잖아 달빛으로 쓴 백지 편지가 될 것이다

불립문자가 될 것이다

 
허나 그것이 저 허공 속 만개한 이심전심이라면

이렇듯 일자 소식 없는 것이 몸경이라면

저 만면 가득한 무소식이야말로 환한 희소식

누군가의 말대로 내 몸 이제 만월에 들겠다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