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박남희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를 저는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 시집『고장 난 아침』 (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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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인성의 소설 제목'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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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박기동
기다리지 말아요
그대
기다리지 않아도
나는
그대에게로 가요
저절로
저절로
그대에게로 가요
-계간『디시올文學』(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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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도종환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시집『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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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임영조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生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 임영조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 시인선 23,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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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고정희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뚝 떼어
가거라,가거라 실어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고정희 시인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한 그는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1975년 『현대시학』 추천을 받은 그는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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