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산이 쓰는 리뷰시 단평]
그 여자의 밀실
장상관
신경줄기에 플러그를 꽂은 냉장고
유통기한 없는 먹을거리 가득 채우고
맹수가 되어 울부짖는다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그녀
수련처럼 건너와 이국에서 황소가 된 여자
안색이 노랗게 물든 단무지
새파란 입술에서 뽑은 시금치
자존심 짓이겨 만든 어묵
벌겋게 달아오른 울화 먹고 자란 홍당무
꼭꼭 만 김밥을 들고
오늘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랑 찾아간다
보고 싶은 마음 누르고 눌러 납작해진 여자
뗏목 같은 대발을 저어가는 베트남
우물거릴 때 울컥울컥 목메면
어느새 달려와 등 두드리는 오빠가
석양이 물든 메콩 강물을 건넨다
단 우엣*을 퉁기며 윽지**를 부르던 강변
십년 전에도 보았다던 철새가
붉은 우단 위에 둥지를 틀고 울듯
오빠가 부는 휘파람이
그녀의 입술에서 절뚝절뚝 새어나온다
때때로 김밥을 말아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불러 먹여야
냉장고가 울지 않는 밀실이 있다
―『문학․선』 2009년 봄호
*단 우엣: 달처럼 생긴 베트남 현악기.
**윽지: 소망이라는 베트남 노래 제목.
베트남에서 한국에 시집온 한 여인의 슬픔을 노래한 시다. “수련처럼 건너와 이국에서 황소가 된 여자”라는 구절이 이 여인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연꽃처럼 아름다움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 건너왔지만 그 여인에게 주어진 것은 힘든 노동과 외로움뿐이다. 이렇게 외국인 이주민들은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형성하고 있다. 이 타자들의 삶을 끌어안고 타자들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만들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열린사회가 된다. 은폐되거나 지워져 왔을 소수자들의 언어를 드러내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시를 쓴 시인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의 일부라고 고통스럽게 반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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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리다
장혜원
그가 질펀히 엎어져 있다 취기에 눌리어 몸을 가누지 못한다. 여미고 푸는 일마다 서열이 있었으나 처음부터 허방에 빠졌다 난간에 선 버튼이 열기에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고 한다 부풀다 꺼져버린 허기들이 팔꿈치 관절 아래 몇 번씩 겹쳐지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못한 등허리는 중심이 비틀린 채 빗금진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가시랭이가 도대체 어디 숨어있었던 걸까 호주머니 속을 들여다보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멍울들이 우우우, 새까맣게 토해낸다
널브러진 그를 몇 날 며칠 다려도
융해점에 이르지 못하고,
온도조절기의 눈금은 36.5도에서 멎은 채 헛돈다
―『시평』2009년 겨울호
구겨진 옷을 다려 깔끔하게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와이셔츠 하나를 다리는 일도 그리 단순하지 않고 많은 정성과 노력을 요한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이 다리려는 대상이 한 인간일 때 그것은 너무도 힘들 게 뻔한 일이다. 나아가 다려서 정리해주고 싶은 대상이 자기 남편이나 자식 등 가족일 때는 그 마음씀의 고통이 더 심할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다른 사람이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 욕망은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 나타나 나의 능력을 무화시킨다. 시인은 결국 36.5도에 머물고 만다. 그것은 피차 인간임을 깨닫는 인간선언이다. 삶의 작은 계기들에서 깨달음을 끌어낸 혜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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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
전건호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선 248년
너와 마주한 순간이 한 달이 되고
짧았던 키스도 며칠이 되는 거지
눈 깜짝할 사이 스친 인연도
백 년의 사랑이 되는 거야
그러나 지구에서의 한 생애가
어느 별에서는 한 시간
일 억 년 전 내 영혼의 파편 하나가
별나라 초원에서 뜨겁게 키스하는 찰나가
지구별의 백년
그 간극을 헤매며 숨 가쁜 거야
칼바람이 부는 날엔
명왕성으로 떠나
순간을 미적분 해 살을 붙여보는 거야
시간의 협곡을 누비며
지구와 명왕성 사이 흐르는 강물에
징검다리를 놓고
길가엔 꽃을 심는 거야
찰나를 미적분 해
살붙이고 인수분해 하면
가시 돋아날 자리
푸른 싹이 돋아날 거야
―『시로여는세상』2009년 겨울호
수학시간에 처음으로 미적분 개념을 배웠을 때, 작은 변화에 엄청난 새로운 세상이 놓여 있음을 깨닫고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이 시의 시인도 그런 깨달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어떤 다른 한 존재와 함께 한 짧은 시간 안에 사실은 길고 깊은 존재들 간의 간극을 헤매며 다가간 우주론적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불교적 연기론과도 관계되어 보이는 조금은 익숙한 깨달음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희망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영원 속에서 안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 속에서의 실천이 “푸른 싹”을 돋게 하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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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정미경
먼지들이 창고를 점령했다
바겐세일의 끄트머리에서
상표 위에 상표가 덧입혀지고
가격은 자꾸만 하락한다
희미하게 날이 선 바지들
근사한 외출 한번 걸치지 못한 점퍼들
어둠의 치수를 재며
먼지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오래도록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들
옷걸이를 붙들고 산다
밖으로 몰려갔던 것들이 되돌아와
어둠을 켜켜이 껴입고 잠이 든다
계절을 놓쳐 버린 저것들은 또 한철
버텨야 한다
때론 유행을 놓쳐 버리고
가격표가 반쯤 잘려 자루에 담긴다
오직 무게만이 몸값
제값을 거품처럼 물고 있는
옷가지들 사이로
깃을 들어 올릴 때마다 묻어나는
할인된 슬픔의 무게들
이곳은 막다른 골목이고
나는 제철에서 밀려났다
―『시에』 2009년 겨울호
재고로 남은 옷가지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다 상품이다. 사고 팔리는 시장에서 교환가치를 얻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사고 팔리지 못한 존재들도 양산해 낸다. 상품이면서 팔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이고 슬픔을 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끼는 슬픔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근원이 여기에 있다. 자신을 할인하며 살다 폐기처분될 날을 기다리는 옷가지들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이 팔리기만을 기다린다. 팔리지 않으면 루저가 된다. 바로 이 슬픔의 어두운 골목이 우리들의 삶의 조건이다. 그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오늘도 이런 시를 쓰고 있으리라. 시의 제목이 시의 의미를 잘 살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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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波紋)
정 원
울림은,
꽁지 끝에서 잔잔히 수면으로 전해진다.
물잠자리의 하늘이 수위를 가늠하던 수련(睡蓮)의 이파리 위에
연못을 그려 넣을 즈음 나뭇잎보다 가벼운 가을은
불빛보다 환한 풀벌레 울음소리와 바람을 풀어 놓는다
생각에 잠기는 오후, 교감일까,
소금쟁이의 종종걸음이
가지 끝에 걸린 저녁 빛에 붉다 못해 시리다
전생의 오랜 수행(修行)이 물 위에 길 하나를 그리고
쉬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 중심을 따라 하나의 물결이 되는지
움직임은 바람보다 가볍다
종일 기웃거리던 햇살도 뒤돌아 갸웃거리던 물밑, 그런 호기심으로
연못엔 달이 뜨고
둥그런 물결처럼 부풀어 마냥, 가을이
홍시처럼 익어갈 때
앞산엔 벌써 몇 그루 단풍나무도 스스로 제 몸을 태우고
만월(滿月)로 들어차 앉는다.
꽃을 피우는 일이,
줄기를 세우고 하늘하늘 물빛을 그려내는 일처럼
중심으로 차오르는 달빛,
연못 안엔
수련(垂蓮)으로 열리는 둥근 물결 같은 우주(宇宙) 하나가
노란 달덩이로 눕는다.
―『현대시문학』 2009년 겨울호
울림과 파동은 교감과 소통의 필수 요소이다. 소리이거나 수면의 파문이거나 그것들은 하나의 존재가 그 의미를 다른 존재들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세상은 조화를 이루고 또 많은 생명들은 시간 속에서 순환한다. 하지만 그러한 울림은 “바람보다 가볍다.” 소통을 하고 우주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모두 가볍다. 소금쟁이, 물잠자리, 나뭇잎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자연을 이 가벼움이라는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은 욕망이다. 이 욕망을 벗어버릴 때 자연의 빈 가벼움이 눈에 들어오고 비로소 “수련으로 열리”고 “노란 달덩이”로 채워지는 충만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목가적 자연을 넘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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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정이향
어둠이 눈부신 곳은
어미의 자궁같다
입구를 향해 전력질주 한다
나는 방금 동전터널*에서 또 한생을 건너와
탯줄을 자른다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마음 여는 문이 된다고 했으나
튕기듯 달아나 버리는 기억들
주춤거리는 사이 한 생의 신호체제가 엉망이 된다
언제나 이곳에서 나는 갓난아이가 된다
파란색 표지판에 좌회전 화살표
어머니의 그곳보다 더 익숙지 않은
낱말 들고 문장을 끼우려 가는 길이 바쁘다
뒤 다라 나오는 차들이 추월선을 향하고
질주하는 속력, 쉼표가 빠져있다
―『다층』 2009년 가을호
* 마산에서 통영 가는 사이 진동마을의 터널.
우리는 속도의 경쟁 속에서 산다. 특히 현대는 그러한 속도를 요구한다. 신인으로 어떤 곳에 등장하는 것은 그 관성적인 속도를 타야 할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다. 시인 역시 이제 신인으로 문단에 등장해 활동을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미숙하고 운전 중 터널을 들어가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신호 체계 또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쉼 없이 밀려드는 타인들의 속도에 그저 당황할 뿐이다. 사실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속도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시 쓰는 곳에서조차 우리는 다들 속도에 쫓기고 있다. 좀 더 빨리 알려져야 하고 좀 더 일찍 뭔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그렇다면? 시인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부대끼며 이런 작품 하나를 남겨 애써 쉼표를 찍는다. 어쩌면 우리시대 시를 쓰는 일이 이런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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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상사
조유리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오백 년 걸렸는지 몰라, 환장하게 숨이 차는 거라 연장은 가파르고 나의 노동은 꽃살문짝 젖히려다 꽃날을 삼킨 거라 생사가 용접된 순간을 수습하기 위해 모퉁이 드러난 그믐달을 지목하거나 까진 무르팍에 옹송그린 몇 개의 기호들을 염탐해 보지만 접신 쩍 들러붙는 순간 천공을 틀어막은 벼랑을 천기누설죄에 봉할 것인가 왼손과 오른손, 갈빗살과 갈빗대를 끊어 노를 저은 하룻밤 행적은 수족이어서, 한 몸의 동의어라서
내 배꼽 위에 방사된 언어들로 나는 영영 블라우스 단추를 여밀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거라
―『미네르바』 2009년 여름호
섹스의 이미지를 이렇게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시를 본 적이 없다. 섹스는 대상과의 가장 극적이고 치열한 결합의 행위이다. 흔히 그것을 ‘한 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한 몸의 동의어라서”라는 말로 뒤를 흐리고 있다. 한 몸인 것 같은 강렬한 경험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의어이다. 그냥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배 위에서 죽은 것들은 방사된 정자들이겠지만 또한 그것은 언어들이다. 누군가와의 결합은 말이지만 그 말이 죽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영영 블라우스 단추를 여밀 수 없게” 될, 즉 죽을 것 같은 쾌락을 느낀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을 시인은 이런 치열한 언어들로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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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최승익
천둥 번개로 하늘 갈라지고 땅은 부서진 다음
뿌리로 성장한 미물들 하나하나가 견제하며
성취한 반복된 사이클의 균형
작은 몸피 비상하는 저 텃새들
입술다시며 부리를 씻고 있는
저들의 노랫소리 들어보아
먹이사슬로 존재하는 먹고 먹히는 작은 몸들의
당당한 유전의 질서를 보아
치열한 경쟁으로 실존하는 한갓 미물의 성장도 저러한데
생태계의 저 엄연한 순리를 누가 파괴하고 있는가를
저들을 위해 누가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가를
두 눈 뜨고 바라보아
누가 힘을 길러야 하는가를
저들의 칼날 앞에 누가 이기고 지는가를
―공동시집『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화남, 2009년 7월
자본의 힘을 앞세워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권력과 그 하수인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작품이다. 물론 이런 시를 두고 문학은 선전이 아니다, 라고 지적하기도 하고 시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듯이 시 역시 여러 가지 방식의 말 걸기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주장을 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공동체의 노래가 되는 시 역시 있어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꾸밈없고 간결한 시인의 외침이 우리가 움직여야 할 절박함을 더욱 강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도 누군가의 천적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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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을 오르며
최윤태
수백 길 폭포
오를 수 없는 벽
자일 늘여 치핑해머 거머잡고, 수직 빙벽에 오른다
낙빙에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야
아차 실수로 떨어지는 것이야
하는, 겁이 없겠냐마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이지 않는 날을 벽에 깊숙이 박아 넣고
사력을 다해 튀어 오르기도
네발로 설설 기기도
머리 집어넣고 찰싹 엎드리기도
무릎 꿇기도 하며
아스라이 오르는 벽
오직 믿음 하나로
시린 바람에 진땀으로 박아 넣는 날 끝
의 희망,
삶이 고단하면 날이 선다
―『딩아돌하』2009년 봄호
* 치핑해머: 빙벽을 오를 때 쓰는 끝이 예리한 호미 같은 해머.
이 시의 핵심은 “시린 바람에 진땀으로 박아 넣는 날 끝/의 희망,”이라는 두 행에 있다. 시인은 구태여 가장 결합이 강한 명사와 조사 사이를 행갈이 하고 있다. 빙벽을 오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노력으로 치핑해머의 날 끝을 보여주고 그 날 끝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날 끝의 위태로움과 희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무게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심리적 거리를 주기 위해 그러한 행갈이를 한 것이다. 삶의 고통을 이겨나가려는 강인한 삶의 의지가 느끼게 해주는 남성적 언어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마지막 행은 사족으로 보인다.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빙벽이라는 이미지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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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는 것들은
한문수
눈물이 팍 꽂혔다
바늘보다 더 뾰족한 슬픔이 찔러대는지
빨갛게 눈물 터진다
폭탄 끌어안고 그냥 이대로 터져 버리면
얼마나 많은 핏방울이 뿌려질까
바람이 휘청거린다
발에 밟히는 것이 있다
길쭉하고 미끄러운 것에서 물컹함이 느껴졌다
바람이 삐걱한다
어디에선가 자꾸 비밀 같은 것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불을 들쳐 들었다
버림받은 울음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돌아보지 않던 이빨이 만져진다
풍선처럼 날아올랐던 가슴들이 구석에서 떨고 있다
다 빠져 나간 빈집처럼
먼지 날리고 쓰레기 되면 주저앉는 것
불이 꺼지고 어둠에 박혀서
잊힐 날들만
고개 내밀다 밟히고, 밟히다가
바닥이 된 얼룩
발걸음 오가는 길바닥을 생각한다
다시 굳어지는 침묵 또 바람이 지나간다
얼룩으로 일그러지다, 끝내
바닥에서 사라지는 흙먼지가 될 것이다
바람에 끌려가는 휴지조각처럼
발에 체이는 돌멩이처럼
버려지는 것들은
―『시에』 2009년 겨울호
대개 우리 모두는 버려지는 것들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쓸모가 없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애써 이 버려지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버려지는 것들의 갖가지 느낌과 모습을 묘사해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버려지는 것들도 형태와 모양과 느낌과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버려져 의미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 역시 분명한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시인은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은 바로 이 버려지는 것을 통해 과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되묻고 있다. 그런데 너무 감상에 치우쳐 있다는 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버려지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전할 수 있다. 구태여 ‘울음’이나 ‘눈물’ 등의 용어를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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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 맞네
황구하
고향이 어디여,
새 시집에 싸인을 하며 그가 묻는다
부암리요, 하니
벼락 맞네 난 그 옆 만악리잖여
딱히 뭐라 표현이 안 되는
거시기한 말 거시기처럼
엄니 아부지 입에서 그냥 술술 풀려나오던
벼락 맞네
환장하네 벼락 맞네 반갑네 벼락 맞네 기분 좋네 벼락 맞네 뜬금없네 벼락 맞네 놀랍네 벼락 맞네 큰일이네 벼락 맞네 황당하네 벼락 맞네 가소롭네 벼락 맞네 불쌍하네 벼락 맞네 슬프네 벼락 맞네 안타깝네 벼락 맞네 이상하네 벼락 맞네 우습네 벼락 맞네 어이없네 벼락 맞네 별일이네 벼락 맞네 당연하네 벼락 맞네 재미있네 벼락 맞네 배꼽잡네 벼락 맞네 미치겠네 벼락 맞네 눈물 나네 벼락 맞네
바람으로 노닐다* 터벅터벅 건너온
벼락 맞네
고향 하늘 운판
벼락 맞네, 벼락을 맞네
―『스토리문학』2009년 12월호
* 안용산 시인의 시집 이름.
재미있는 언어를 발견한 시인의 기쁨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시인에게 이토록 재미있게 느껴졌을까? 단순히 옛 고향 생각나게 해서 또는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쓰지 않는 나이든 어른들만이 쓰는 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말이 잊혀진 말이기도 하지만 벼락 맞는 일 같은 것이 또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조는 바로 권태이다. 아무리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수많은 엽기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더라도 각 개인은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쩌면 이 권태 때문에 사람들은 쓸데없는 변화를 도모하고 사건들을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벼락 맞네”는 바로 이 권태를 깨는 말이다. 벼락 맞게 즐거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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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쇼
―석류굴에서
황지형
혀를 말아 천장에 붙인 틈새로
뾰족한 이빨들이 쑥덕거렸다
수천 년 다물었던 말문이 트여
곱들이, 톡톡이, 장님엽새우,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던 신비한 말들이 자랐다
목젖마다 걸린 말들은
느릿느릿 돌이 되었다
선거공약을 내뱉는 TV에서는
하얀 말보다 검은말이 뛰어다녔다
말벌에 쏘인 말을 타고 달리는 유목민처럼
말의 옆구리에서 떨어질 듯 묘기를 부릴 때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아라고나이트처럼 만발한 검은말은
무색투명한 광택의 희귀한 구설수를 낳고 말았다
혓바닥에 침전물이 떨어질 때마다
천장을 향해 까만 석순이 자라났다
단단한 말뚝에 고삐를 걸고
전속력으로 빙빙 돌다 놓아버리면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원심력으로 궤도를 이탈할 것이다
회오리치는 화면 속으론 누군가 빨려들 것이다
수백 년 자라온 석순의 언어는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신비한 법
먼지구름을 날리는 야생마처럼
포말로 흩어지는 후보자의 기호를 보았다
말의 말미엔 하나 같이 고삐가 풀어지고 없었다
―『리토피아』 2009년 가을호
근래에 보기드믄 현실비판적인 시이다. 진정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쇼가 되어버린 선거판의 모습을 재밌게 표현한 작품이다. 말을 하는 후보자들의 모습을 동음이의어인 ‘말’을 타고 벌이는 마상쇼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고 또 신선하다. 마상쇼의 말들처럼 후보자들의 말 역시 아슬아슬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시인은 그 말이 결국 고삐 풀린 허망한 공약이 되리라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말의 비진정성이 후보자 선거방송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전부 이런 말의 오염 속이다. 시인은 그것을 동굴로 표현하고 있다. 그 동굴에서 자라난 석순이 결국 튀어나와 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시인들의 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진정성 가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단순한 현실비판을 넘어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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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내
황진성
화려한 실크도 아니고 부드러운 코튼도 아닌
울 칠십 퍼센트 폴리 삼십 퍼센트로 직조된 그의 바지
세탁통 비눗물 속에 담그자
지난밤처럼 뻣뻣하게 일어선다
씨줄 날줄은 어젯밤을 기억하듯
흥분으로 온몸의 각을 세운다
날렵한 콧잔등의 예각과 신음을 뱉던 둔각의 입술
살살 만지고 달래어 빨랫줄에 내다 건다
헤픈 입단속을 하듯 집게로 꾹꾹 눌러 놓는다
씨줄과 날줄이 만든 네모진 신방으로
바람 드나들고 햇살이 놀러온다
물방울이 하얗게 부서지며 떠나버린 뒤
다리미와 뜨거운 입맞춤으로 해후를 한다
예리하게 각을 품은 바지를 입혀 세상에 출정시킨다
내 사내, 누구라도 함부로 손대면 베이도록
―『시와인식』 2009년 겨울호
요새 ‘남보원’이라는 코미디 프로가 인기다. 땅에 떨어진 남성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여성의 차별이 아직 잔존하는 사회에서 좀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남성이 권력을 가진 것은 아직 확실하지만 남성성이 무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모든 가치 있는 것에는 여성성이 붙어 있다. 환경이나 평화와 공존 모두 여성적 가치관이라고 이름 붙인다. 글쓰기마저 여성적이라는 주장까지 있지 않은가? 이 시는 이런 남성적인 것에 대한 변호이고 방어이다. 하지만 남성성은 이제 바지 속에서 혼자 늠름하게 갇혀 지내고 있다. 과연 어느 누구 하나 피 한 방울 흘리게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가 정말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황정산
전남 목포 출생.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2001년『현대시문학』으로 시 등단. 평론집 『주변에서 글쓰기』등.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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