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평 모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9. 22. 15:17
728x90

 

[2010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폴터가이스트 

               -   성은주


  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 천, 천, 히 잠드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 동구나무처럼 서 있다가 숨 찾아 우주를 떠돌던 시선은 나를 더듬기 시작하네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지

  그들은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고 가끔, 열쇠를 집어삼켜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울곤 해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화장실 문은 물큰물큰 삐걱대며 겁을 주기도 해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리지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져

  골치 아픈 그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광대를 찾아갔지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어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그러다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어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

  붙어있던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를 떠났어

  온갖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있네

 

* Poltergeist: 불안정하게 소란을 피우는 영(靈)

 

[당선소감]

폴터가이스트 - 성은주
시를 쓸 수 있도록 해준 '지금'과 '공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세상 만물과 연애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습니다. 무엇에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닌,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문학은 나를 발견해주는 치료제였고, 소외된 사유를 관계의 중심으로 옮겨 놓아 주었습니다. 시는 제 파토스에 하나하나 리본을 달아주며 질서 있게 나를 복원시키려 했습니다. 의미 없는 의미들이 부식되던, 어제는 감각적인 경계를 만나 별도의 설명도 없이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랑할 대상을 찾아 떠났습니다.

당선소감을 쓰는 날 이사를 했습니다. 눈 때문에 살짝살짝 하얗게 지워지는 길 위에서 생각했습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지워져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지워지는 건 두려운 게 아니었나 봅니다. 작년 이맘때쯤 USB의 고장으로 모든 작품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잃었기 때문에 얻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기뻐해 주실 지도교수님과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한남대 문창과 교수님들, 학점을 잘 주셨던 이재무 교수님, 늘 멘토링 받고 싶은 김동석 소장님, 시정신학회 회원들, 사랑하는 친구들, 당근, 앨리스,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믿고 지켜봐 주시는 아버지, 독수리 오형제보다 강한 우리 오자매 언니들, 형부들, 조카들, 사무엘 사랑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엄마, 할머니, 하느님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감사를 명료하게 밝힐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시다운 시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한남대 대학원 문창과 재학 중

 

[심사평]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 외 2편과 김아타의 '달로 날아가는 방' 외 5편이었다.

김아타의 시는 새로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체 실험실에서 나온 듯한 그의 의욕적인 작품들은 특이한 언어의 선택과 뒤틀린 배치, 엉뚱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평범한 문법을 거부하려는 신인의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단절을 앞세우는 듯한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을 누가 읽어낼 수 있겠는가. 현란한 수사에의 도취는 자칫 시의 본질을 벗어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폴터가이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든든한 문학적 역량이 느껴졌고 신뢰가 깊이 갔던 작품이다. '폴터가이스트'는 불안을 형상화했다. 불안을 토로하는 것은 쉽지만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이 묻어 있는 어눌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공포를 잠시 해소시키는 짧은 농담, 살얼음처럼 떨리는 섬세한 문체로, 불안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심사위원 : 문정희, 최승호

 

 

[201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유병록


,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당선소감]

유병록

 

꽉 쥔 주먹처럼 의지 견고하게 할 것

 

나는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커다란 손도 있다 한 번 휘두르면 길이 나고 바다에 띄우면 그대로 배가 되는 손, 그 계곡에서는 물줄기가 흐르는데, 역사라고 불린다는데

이 조그만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은 연약한 도구에 불과하다 오므려보지만 물 컵으로 삼기에도 작다 흘러 다니는 운명이라고는 고작해야 목을 축이기에도 부족한데
 
겨울 산에 오르자, 폭포가 꽝꽝 얼어붙어 있다 길게 펼쳤던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쥔 폭포, 울퉁불퉁 힘줄이 솟은 물의 팔뚝, 안쪽으로 흐르는 뜨거운 혈관

즐거운 한때를 어루만졌던 손을 씻고 주먹을 쥔다 더 이상 운명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지를 움켜쥐었을 때의 주먹은 견고하다 이제 일격으로 몽상의 호숫가에서 물 마시는 저 물소들을 때려눕힐 시간이다

꽉 쥔 주먹을 가끔 펼친다면 가족과 친구들의 손을 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제자를 격려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결점 많은 작품을 위해 기꺼이 통곡의 벽이 되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생물의 마지막 순간 끈질기게 천착


  예심에서 골라준 시 작품들 가운데서 다섯 분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거론했다. 성동혁의 ‘렌터카를 타고’ 외 4편은 장식적이거나 매끄럽지 않은 조립이 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유희로 전환하는 유머가 돋보였다. 안웅선의 ‘미션스쿨의 하루’ 외 4편은 간혹 서사를 기록할 때 어색한 문장들이 들어있는 시편이 있었지만 미성숙한 사춘기 화자를 내세워 오히려 내면적 고투의 나날이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다.

  강윤미의 ‘소심한 소녀의 소보루 굽기’외 4편은 암시성이 확장하는 폭은 좁았지만 지루한 일상에 발랄한 리듬과 어조의 고명을 얹어 아기자기한 서술이 되게 하는 상쾌함이 장점이었다. 박은지의 ‘서랍의 눈’ 외 4편은 시에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언술들이 섞여 들었지만 한 가지 사물이나 현상을 끈질기게 해석해 보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가 눈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유병록의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외 4편 모두가 절명의 순간에 바쳐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생물의 마지막 그 한순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간혹 상투적 해석이 불필요하게 첨가되었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단연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작품들 간의 질적 수준의 균질함,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 등이 탁월했다.

 
심사자 : 최동호 시인·김혜순 시인

 

  

[2010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검은 구두

 

검은 구두

                  김성태

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당선소감]

"눈물의 마운드에 섰다… 나는 아직 2군이다"

 

홈런을 치지 못한 예비 시인들이 흘림체로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미안하다. 그 어느 날을 위해 그 어느 날은 패전투수처럼 연필을 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뜨끈뜨끈한 눈물의 마운드에 서있다. 심사위원 선생님이 선발등판을 허락해주셨다. 관중석 한 구석에서 나를 응원하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 이름은 김재숙, 어머니다. 보희 누나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모자를 벗는다. 고개를 숙여 감사드린다.

대형서점에서 시집은 다섯 평의 영토만 갖는다. 식민지적 삶이라고 해도, 나는 시를 떠나 살 수 없다. 내 피는 C(詩)형이고 종이는 피부이기에 서걱거리는 연필을 놓을 수가 없다. 노트를 넘길 때마다 밤바다 소리가 들린다. 검은 모래사장 흰 고래처럼 갸릉갸릉 심연에 쌓여있는 언어를 불러본다. 단어 하나를 잃을까 봐 공포에 떨기를 여러 번, 처절하게 시를 썼고 홀로 외로워했다. 남루해지는 얼굴을 보고 슬펐다면 가난해지는 시를 보고는 분노했다. 이렇게 내가 시인이 되었다. 문학하는 당신이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시는 간절함이다. 짝사랑하는 마음은 문장을 슬프게 만들고, 대상을 그립게 만들고, 행동을 재촉하게 만든다. 타고난 무엇도 절박한 무엇을 이기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2군이다. 오늘도 헛스윙이다. 다시 주저앉아 조용히 시를 써야 한다. 진정 왜 시를 쓰는가. 초 단위로 담뱃불이 명멸한다. 내 등은 내가 볼 수 없는 자리다. 시인으로서 내 뒷모습이 슬프지만 아름답게 그려졌으면 좋겠다.

 

[인터뷰]

"행과 행 사이에 울림이 있는 시 쓰렵니다"

 

"당선도 당선이지만 저만의 시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김성태(24)씨에게 시가 '들어온'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사귀어왔던 절친한 친구를 사고로 막 잃고 나서다. 접신(接神)의 시간처럼 가을 내내 시를 쓰며 그 허무함과 절망감을 달랬다. 당선작은 그 친구의 장례식에 가서 마구 뒤섞여 있는 구두들을 보며 착상한 시다. '구두에는 계급이 없구나. 구두는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의 흔적을 보여주는구나'라는 생각에서 시는 출발했다.

 

김씨는 기성 시인들의 지도를 받지도, 시인 지망생들의 합평 모임에 참석하지도,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혼자서 습작기를 보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라서 시인들로부터 조언을 받을까 하기도 했지만, 시 쓰는 기술보다는 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머리맡에 시집을 두고 틈만 나면 시를 쓰고 지우며 스스로를 연단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좌우명"이라는 그는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 방 한쪽 벽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돼 있다고 한다.

시만큼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취향과 무관하지 않게,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지난해에만 70편 이상의 연극과 뮤지컬을 봤고 희곡도 100편 이상 읽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의 촉수를 뻗치고 있는 그는 환한 하늘과 어두운 집, 하늘을 나는 신사 등 이질적 풍경 속에 대상을 배치해 상상을 자극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다가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는 그는 "이 구절이 무서운 성찰 없이 울림 있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며 "행과 행, 문장과 문장 사이에 울림이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평]

일상의 관찰력·꿰맨 자국 없는 표현 미덕

 

심사자들은 응모작을 셋으로 나눠 예심을 본 후에 올린 20편의 작품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정움의 '실종', 이정현의 '빗살무늬토기의 냄새', 김성태(필명 김아타)의 '검은 구두' 등 3편이었다.

'실종'은 산악 등반을 소재로 하여 극한상황의 고통을 담담하게 성찰한 수작이다. '주인 없는 발자국도 신앙'인 고지대, '짐승의 몸을 가진 바람', 사방에서 채찍을 휘둘러오는 길 등과 같은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작고 나약한 육체에서 꺼낸 의지를 대비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냈다. 감정을 잘 통제하면서 종교적인 경지가 느껴질 정도로 강한 극기의 사유를 관념과 감각을 조화시켜 그린 점이 돋보였다.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신석기 사내가 비와 흙과 하늘로 빗살무늬토기를 빚는 과정을 상상한 시다. 오랫동안 보아서 사내의 몸에 충분히 육화된 빗줄기를 흙에 넣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빗살무늬 속에 내재된 기억의 원형을 현대인인 화자의 시점에서 읽어내고 신석기와 현대의 시공간을 빗줄기와 흙 속의 냄새로 결합시키는 상상력이 특히 볼 만하였다.

'검은 구두'는 쉽고 평이해 보이지만 구두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방법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 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관찰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꿰맨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현과 그것에 잘 어울리는 유머러스한 어조도 이 시의 미덕인데, 그것은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오랫동안 육화되었다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아쉽게도 두 작품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종'은 시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여 전체적으로 부자유스럽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같이 논의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에 반해 '검은 구두'는 삶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고, 작은 것 속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발상도 참신하여,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길 기대한다. 끝까지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매머드 뼈'(김영각)와 '프로필'(기리나)도 매력적인 개성을 지닌 가작이었음을 밝힌다.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이시영(시인·단국대 초빙교수), 김기택(시인)

 

[2010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 이길상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밤,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당선소감]

 “詩가 말하지 않을 때 시가 왔다”

 

야구 시즌이 끝나고서야 잠자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인적 없는 공원. 불빛만이 맑게 새어나왔다.

 내가 나를 피해 다녔으므로 바람 한 장도 햇살처럼 빛났다. 시를 쓰고 있었지만 시는 좀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가 쓸 시간이다.

 볼륨을 줄인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내 숨결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변주곡.

 대문에서 쉰다.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아닌, 그 때 골드베르크가 흘러나온다. 여기 대문 앞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미 문이 닫히고 길은 사라지고 없다. 저기 까맣게 타는 불빛이 길이 되는 건 아닐까.

 커피를 붓는다. 밤에 쓰는 편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둠이 커피향처럼 퍼져나간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마음을 놓는다. 당선 소식을 받고 산책을 나간다. 눈발이 반갑다. 밀감장수가 파는 귤이 보인다. 귤보다 귤빛이 만져지는 시를 쓰고 싶다. 먹지 않아도 따스한 그 귤빛을 맛보고 싶다.

 우선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정배, 윤미, 의주, 재호, 석진, 많은 힘이 되어준 성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채규판 교수님과 정영길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강연호 교수님, 열심히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

 

약력

-1972년 전주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사이버 신춘문예 시 당선


[심사평] 

거친 행간 오늘보다 내일에 더 기대


  시를 읽고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경제는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시하고 상관없이 삶은 잘도 돌아간다. 그리 시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놀라운 일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시의 나라라고 불러도 지구인 중에 시비를 걸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시의 풍요와 다양성을 이번 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 열여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이 중에서 류성훈, 강윤미, 김희정, 최설, 손현승, 이길상씨의 작품을 1차로 골랐다. 모두들 중요한 패를 하나씩은 움켜쥐고 있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갱신할 뒷심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손현승씨의 시들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시에 가한 바느질 솜씨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선배시인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 최설씨의 시는 시적 대상을 해석하려는 끈질긴 탐구심이 볼 만했다.
  그러나 사유를 서술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어서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길상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때때로 거친 어휘와 난해한 이미지가 날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속에서 올라온 어떤 ‘찐한 것’이 스며 있는 시이다. 자아가 세계를 통과할 때의 단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점을 좋게 읽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불안하고 거친 것을, 오늘의 시보다는 내일의 시를 택한 결과다. 축하한다. 이제 좋은 시인으로서 그가 응답할 차례다.

 

[2010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직선의 방식

        -이만섭-
 
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당선소감]

“독립군처럼 글을 써왔습니다.”

 

시 부문 당선자 이만섭씨(55)는 제대로 된 문학 수업 한 번 받은 적 없다. 정읍농고 졸업이 최종 학력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전북 고창의 ‘벽촌 산골 학교’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고 문학에의 꿈을 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문학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다. 이씨의 ‘문학 독학’은 그렇게 시작됐다.

건설·주택 관련 일을 하고 리모델링 사무실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고, 김윤식·김현 등의 평론집과 ‘문학사상’ ‘현대문학’ 등 문학 잡지를 빼놓지 않고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고 싶어 소설 공부와 소설 쓰기에 매진했다. 이문구와 김주영의 소설 등 1970년대 작가들의 소설을 섭렵했다. 그러다가 5년 전부터 시를 썼다. 장에 천공이 생기면서 치료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서다.

“수술받고 요양하면서 시간이 많이 생기니까 시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더군요. 병석에 있었던 시간들이 오히려 시 쓰기의 끈을 붙잡아 준 것 같아요.”

좋았기 때문에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글쓰기다. 김승희 시인의 “목숨 걸고 쓰라”는 말을 되새기며 글을 썼다.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에서 문학 카페를 운영하며 글을 썼고, 5년간 1600여편의 시를 써왔다. 지방 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마다하다가, 지난해부터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두 번째, 올해 당선됐다.

집 앞 슈퍼마켓에 포도를 사러 나갔다가 당선 소식을 들은 그는 순간 먹먹해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묵묵히 남편을 지켜봤던 아내와 두 아들은 뜨거운 축하를 보냈다. 자식이 ‘돈 안 되는 문학’을 하는 것을 한사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팔순 어머니도 지인이 당선 축하의 의미로 보내온 꽃바구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당선작 ‘직선의 방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이씨의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물이나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이끌어낸 정제된 언어로 시를 쓰고 싶다”는 이씨의 말처럼 직선에 대한 이씨의 사유가 정갈한 언어로 담겨 있다. 서정주, 박재삼, 고정희, 김명인, 나희덕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씨는 “사유를 담는 좋은 시, 참된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평]

닳도록 갈고 닦은 안정감


본심에 스물세 분의 시가 올라왔다. 풍작이다. 전체적으로 두드러진 경향은 시들이 산문적이라는 것이다. 산문으로 풀더라도 시로서 자기부양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서술에 그치고, 서술하다 보니 설명이 되고, 설명하다 보니 추락했다.

  처음 걸러 열두 분의 시가 올랐고 거기서 정창준(‘누이의 방’ 외), 이현미(‘자장가’ 외), 강다솜(‘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 외), 이만섭(‘바람의 형용사’ 외) 이렇게 네 분이 남았다. 모두 내려놓기 아쉬운 분들이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작은 한 편만 실리는데 한 편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만한 표면장력이 제일 센 분이 이만섭이었다. 다른 세 분의 시들은 응모한 여러 편 속에서는 유니크한데, 한 편을 세우기에는 좀 약했다.

  정창준의 시들은 도드라진 구절도 많지만 ‘자기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시는 고흐를 꿰뚫는 정창준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고흐에게 기댄다. 강다솜은 시를 일순에 성립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의 시구들은 주위의 단어들을 끌어당겨 수렴하는 자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하자마자 바로 이어 무리한 메타포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예컨대 ‘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에서 “발자국 속에 갇힌 공룡의 그림자가 중생대에서부터 이 저녁을 덮고 있다”는 무슨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말씀인지. 그리고 “고요의 발자국 소리가 생긴다” 같은 구절은 발랄한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붕 떠 있다. 시라는 게 부력이지만, 그 아래 하중을 못 받으면 사라져버린다. 우리 기성시인도 명심할 일인데 단어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 메타포 하나하나, 시인이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현미의 ‘자장가’는 발랄하고 새롭다. 그 조를 밀고 나가기를 기대한다.

  당선작 ‘직선의 방식’의 시인 이만섭에게서는 붓이 닳아지도록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가 느껴진다.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그의 포에지랄지 시상이 한 지점에서 맴돌고 있다. 말하자면 거듭 부연하고 있다. 만만찮게 여겨지는 그의 역량이 그에 대해 스스로를 어떻게 설득하고 깨뜨려 다른 세계를 열어줄지 궁금하다. 축하드린다.(황지우, 황인숙)

 

[2010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당선소감]

문학의 길 가르쳐주신 스승께 큰 절
하이데거는 시의 본질을 구명하는 자리에서 ‘시는 존재의 개명(開明)’이라고 말했습니다. 완성된 시작품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존재를 개명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삶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에서 시 쓰기는 제 생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주물을 부어주고 숨결을 들어앉혀 생동감 넘치는 세계들을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보내고자 합니다. 그 세계 속으로 초대된 사물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 다른 마음결로 싱그러워지기까지 저는 나폴대며 떠가는 민들레 씨앗에 가볍게 얹혀 날아오르다가도 시원한 장대비 따라 두 발 철벅이며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리곤 어디쯤에선가 튼실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단지 절반만 그 자신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의 표현이라고 에머슨은 ‘시인’에서 이른 바 있습니다. 작품을 쓰기 전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작품 속에서 다시금 새롭게 자신의 생을 구체화해야 함을 이른 말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 신대철 선생님께 큰 절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 박성우 시인과 딸내미 규연양, 언니와 동생 가족들,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국민대 학우들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양 김용택 안도현 선생님을 비롯한 전주 쪽 응원부대 여러분, 참 고맙습니다.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더 넓은 문학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에 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권지현

▲1968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성장함

▲국민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9년 ‘김수영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현재 국민대학교 강사

 

[심사평]

담담하고 소박하면서 서정성·균형감 가져

 

  좋은 작품이 여러 편 눈에 띄었다.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는 담담하고 소박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담담하고 소박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공항 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 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갈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처럼 평이한 일상 속에서 삶의 결을 찾아내는 눈은 결코 예사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를 가지고 무슨 엄청난 것을 해보겠 다는 허영심이 억지와 무리로 이어지면서 읽기 어려운 시가 범람하는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새로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낡지 않은 서정성과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주말부부의 쓸쓸한 삶의 단면을 그린 ‘냉동실’이며 박물관을 통하여 과거와 오늘을 대비시킨 ‘플래시’도 이 작자의 저력이 탄탄함을 말 해준다.

  고민교의 ‘어느 결혼이민자를 향한 노래’는 아주 재미있고 따뜻하면서, 시의에 맞는 주제이기도 하다. 쉽게 융합할 수 없는 둘 사이를 가래추자에 비유한 것도 적절하고, 간절한 마지막 구절도 강한 울림을 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시는 역시 시의 특성을 버릴 수 없으며, 시가 산문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신은유의 시 가운데서는 ‘고딕식 첨탑’이 가장 좋았다. 좀더 난삽한 ‘바닥만 보면서 걷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도 마찬가지이지만, 깊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읽으면서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하지만 너무 말이 많고 어지럽다. 말을 고르고 빼는 보다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면 참으로 좋은 시를 쓸 사람으로 생각된다.

  이상 세 사람의 시를 놓고 토의한 끝에 선자들은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유종호, 신경림)

 

[2010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골목의 각질 

            - 강윤미


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강윤미

원광대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나온 그녀는 이미 200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에 당선됐고 2007년엔 광주일보 문학상을 받았다.


[심사평] 
불안한 청춘의 고통과 고뇌 긍정적으로 승화


700여명의 투고자 중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는 모두 11명. 이 중에서 강윤미, 이명우, 장예은, 최영숙, 정한희 등 5명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논의한 결과, 강윤미의 ‘골목의 각질’과 이명우의 ‘붉은 도로’가 남게 되었다. 이명우의 경우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는 뛰어나나 내용이 결핍돼 있다는 점, 삶의 체험을 시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고 설명적인 데다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시는 아이디어로 쓰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으로 쓰는 것이라는 점, 아이디어에 의존하면 실패할 확률은 적지만 그런 시인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이 이명우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었다.

반면 당선작으로 결정된 강윤미의 ‘골목의 각질’은 삶에서 우러나온 시가 진정 좋은 시라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시는 불안한 청춘에 대한 고통과 고뇌를 골목이라는 구체적 삶의 공간을 통해 긍정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특히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자리에 붙어 있다 어쩌면/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라는 부분은 호소력이 뛰어나다.

시는 상식적인 데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삶의 체험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강윤미의 앞날에 신뢰가 갔다. 다만 투고된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했는데 시에 사족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더러 있어 아쉬웠다. 시에 사족이 있으면 완결미가 떨어진다. 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게 아니라는 점, 침묵의 깊이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한국시단의 샛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2010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 박진규


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심사평]

삶의 깊이 응시하는 내면의 시선 미더워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부산경남 지역보다 오히려 타 지역에서 응모한 시가 훨씬 많았다. 신춘문예만큼은 더 이상 중앙과 지역을 구분해서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언어적 기교나 시적 수사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느낌이 들어 신인으로서의 시적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좀 서투른 감이 있더라도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박눈', '탁구치는 자전거', '나무의 온도', '뭉게구름을 확장하다',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패턴화된 시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미지가 육화된 개성 있는 시를 찾는 데 주력했다.

낡고 진부한 서정에 갇힌 시보다는 풍경과 일상을 응시하는 내적 깊이가 시정신의 심화를 불러오는 작품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삶의 깊이를 내면으로 응시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미더웠다.

다만 응모 작품들 간에 시적 경향의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은 신인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예비 시인들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 시와 더불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본심위원 정호승(시인) 최영철(시인) 하상일(문학평론가·동의대 교수)

 

[2010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름의 화법

                                       - 하기정

 
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심사평]

"수사의 굴레 벗어버리려는 시인 의지 돋보여 
예심에서 걸러진 스무 명, 100여편의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시의 미학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르골' '살구알락나방 애벌레' '달의 족적' '몽골파오' 등을 응모한 네 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거듭 논의된 여러 응모작의 중심에서 줄곧 거론되었던 것은 '몽골파오' 외 10여편을 함께 묶어 제출한 응모자의 시편이었다. 그의 응모 작품들은 그만큼 뛰어나 보였다. 그리하여 심사는 자연스럽게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속에서 당선작 한 편을 골라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응모작 중 어떤 작품은 말이 낭비되는 수다스러움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요즈음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읽히는 억지스러운 상상력이 살펴지지 않았다. 그의 시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가슴으로 익힌 정서를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는 개성적인 시의 문법뿐만 아니라 발견의 묘미도 함께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호명되는 낯익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새롭게 정돈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합의해낸 당선작은 '구름의 화법'이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일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살펴보면 언어적 소비에 대한 반감을 바탕에 깔아놓는 등 시인의 상상력이 사물의 운신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수사의 굴레마저 벗어버리려는 시인의 의지가 시적 자유를 온축(蘊蓄)해 보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의 공간 안에서 응고되기를 거부하는 이 미정형의 시선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심사자 : 이하석, 김명인

 

[201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르골 

                     -이 슬

 
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
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
소리가 멎을 때까지 흔들리는 일에 한창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현기증을 다 털어낸 자리
나뭇가지를 뛰어 다니며 놀던 수액들은 모두 바람이 된다
앞뒤를 보여주며
숨기는 것 없다는 듯 보여주는 엽록의 투명한 연주가 길다
잎의 사이사이마다 음계가 반짝 거린다

새들이 앉았다 간 나무 밑 마다
불안한 노래가 가득 떨어져 있다
뿌리가 감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다
칸칸의 어둠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들
가끔 잎을 털어내는 환한 시간이면 날아오르는 새들이 있다

가장 밝았던 한 때
꽃잎의 치어들을 다 허공에 날려 보내고
나무는 지금 푸르게 비어 있다
꽃의 그늘이 진 자리에 초록의 소리가 가득 하다

바람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 속
나이테를 돌아 풀어지는 태엽
평생 춤출 곡이 빙빙 돌아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푸른 치마를 입고 거꾸로 서서 흔들리는 듯
바람이 상자를 닫는 시간
음계들이 떨어진 나무 밑에는 그늘도 다 졌다
나선형의 나이테 그 길이만큼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사평]

비범하고 감각적인 사유 … 신예 출현 기대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나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단정하고 힘 있는 문장이 드물었고, 대개는 장황했다. 한 편의 시는 생략을 통해 되비추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그것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임요희씨가 투고한 ‘포장’외 3편의 작품 가운데 ‘포장’을 주목해서 읽었다. “흰 천으로 싼다”는 이 ‘포장’의 의미는 꽤 중의적으로 읽혔다. 존재의 흔적을 없애는 행위, 혹은 철거라는 의미에 상당할 이 상징은 신선했다. 다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이 작품에 비해 미흡했다.

  이문정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시적인 대상을 내심(內心)으로 끌고 들어가는 인력(引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시한 서정의 내용이 대체로 평이했다.

  박은영씨의 ‘검버섯’외 2편은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함께 경합을 벌인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박씨의 작품은 가만가만 나아가는 시행의 보폭이 신뢰를 갖게 했다. 솔직했고, 과장이 적었다. 작품의 내용이 가계(家系)에 국한된 것들이어서 다른 작품들을 더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슬씨의 ‘모닥불이 달을 굽는다’외 3편은 첫눈에 들었다. 이슬씨의 작품은 부드럽지만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여 위력적이었다. 시적인 대상을 둥글게 감싸는 빛 같은 게 느껴졌다. 대상을 그 외곽에서 한 번 더 감싸는 이 비범하고도 감각적인 사유는 대상에 대한 무궁한 사랑과 뛰어난 통시(洞視)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시 쓰는 이로서의 미덕을 천생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신예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당부를 드린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자 : 이문재

 

[2010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녀의 골반 

                  -석류화

1

비 꿈을 꾸고 엄마는 날 낳았다 흰 꿈, 엄마는 치마폭에 날 쓸어 담았다 커다란 모시나비, 손끝에 잡혔다가 분가루 묻어나갔다 날개 끝에 고인 몇 점 물방울무늬, 방문 밖으로 날았다 돌담에 피는 씀바귀꽃 그늘을 옮겨다녔다 나비 날개엔 먼지가 끼지 않았다 한 꿈, 계단 입구에서 두 날개 맞접고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환한 꿈, 나는 오래전 그녀의 골반을 통과한 나비였다.

2

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 그러니까 그녀의 꺼먼 엉덩이살 안에 나비 날개가 굳어 있었던 거죠 나는 잘 벌어지지 않는 날개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던 거죠 나도 작은 나비모양 엉덩이를 달고 나왔던 거죠 그러니까 그녀가 힘겹게 좌판에 쪼그리고 있었을 때, 날품팔이, 품앗이 할 때 그녀 속의 나비가 조금씩 앓고 있었던 거죠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심사평]

정확한 언어로 시상 엮어 나가는 솜씨에 신뢰

예심을 거쳐 올라온 25명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갈래였다. 안정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익숙한 문법의 작품들과 언어의 긴장이 돋보이는 패기 넘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안정적인 작품들은 패기가 부족하기 쉽고, 언어의 섬세함이 시선을 사로잡는 낯선 문법의 작품들은 공허한 말놀음의 혐의를 넘어서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심사위원 두 사람이 각각 숙독하고 5편씩 고르니 겹친 한 작품을 포함해 9편의 작품이 다시 선별되었다. 논의 끝에 4편을 최종 후보로 골랐다. 권분자의 ‘여우비’ · 성은주의 ‘검은 고양이 카바레의 검은 고양이 신사’ · 김승훈의 ‘입술에 관한 새들의 보고서’ · 석류화의 ‘그녀의 골반’이 그것이다.

권분자의 ‘여우비’는 삶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이 돋보였다. 언어 수련의 과정을 잘 거쳤음을 짐작게 하는 적절한 비유의 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산문적 발상이란 아쉬움을 남겼다. 성은주의 ‘검은 고양이 카바레의 검은 고양이 신사’는 시적 언어의 활달한 운용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의욕이 넘쳐 정작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에 비해 김승훈의 ‘입술에 관한 새들의 보고서’는 언어 자체의 독특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실험적 작품이었다. 상상력의 참신함과 더불어 구조적인 완결성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신춘문예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영탄의 언어는 시의 진정성과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흠결을 드러냈다. 반면 석류화의 ‘그녀의 골반’은 핍진한 삶의 굴곡을 고루 살피는 성숙한 시선이 깃들여 있었다. 정확하고 곡진한 언어로 시상을 잔잔하게 엮어나가는 솜씨가 신뢰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투고한 작품들 모두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반면 젊은 패기가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같이 남겼다. 심사위원들은 탄탄한 사유구조와 시적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석류화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합당한 행운을 차지한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송재학(시인)·엄원태(시인· 대구가톨릭대 교수) 

 

 

유종호씨 새 평론집서 문학평론에 쓴소리 [세계일보]

 

"해석 필요한 곳 슬쩍 넘어가고… 불필요한 부분에선 요설 많고"

문학평론가 유종호(75·사진)씨의 새 평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는 준열하다. 특히 '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 대해 그렇다. 그는 "근자에 시의 해설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해석이 필요한 대목은 슬쩍 넘어가고 불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요설이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고 질타한다. 더 나아가 "수용 감수성과 비평적 총기를 기르지 못하는 문학교육이나 비평 담론은 백해무익하다"며 "모국어로 된 '평이한' 시편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추상적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라고 한탄한다. 이 책의 1부 '시와 말과 사회사'는 이런 경우들을 적시하며 "우리말에 대한 문학 독자의 섬세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쓴 글들"을 모아놓았다.

 

2부는 김춘수 미당 등을 다룬 '시론과 시인론'으로 이어진다. 특히 미당의 삶과 시를 꼼꼼히 분석하면서 비판받는 그의 '정치적 행적'에도 독자적인 평가를 내린다. 유종호씨는 "정치적으로 천진한 어린아이 수준이었다는 미당변호론이 있는데 그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면서 "비판받는 그의 행적은 긴 앞날을 내다볼 여유가 없이 항시 '취직 자리'에 눈이 멀고 마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의 궤적이었다"고 본다. 그는 이어진 '친일시에 대한 소견'에서는 "저급 선전물을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비문학적 행동이며 따라서 친일문학 대신 친일문서로 호칭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라면서 "흠집 없는 영혼에서 나온 문학만을 허용하고 수용한다면 세계의 문학은 대책 없이 황폐화되고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평가와 지적 유행'이라는 글에서는 특정 시인이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는 메커니즘을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평단에서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거론해온 요절시인 기형도를 이른바 '컬트(cult)현상'의 수혜자로 평가한다. "기형도의 직설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 같은 세대에게 자기 발견의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시기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최후는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욱 간곡하게 하였고 그것은 비록 대규모의 것은 아니나 컬트현상으로 귀결되었다고 생각한다."(297쪽) 그는 더 나아가 "산문가 이상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지만 시인 이상에 대해서는 유보감을 가지고 있다"며 "몇몇 읽을 만한 작품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다한 시작품이 사실 잡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과감하게 밝혔다. 그는 말미에 "시인 평가는 문자 그대로 작품 더하기 인물 평가되기가 첩경"이라면서 "일단 평가받으면 과대평가되기 쉽고 그 반대인 경우도 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정 파벌이나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꼼꼼한 읽기로 엄정한 평가를 해온 대표적인 평론가로 성가가 높은 유종호씨는 이번 평론집의 서문에 "날은 저물고 길은 어두운데 외진 구석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라며 "준비하고 있는 '한국근대시사'를 끝내면 초롱불이라도 켜들고 보다 넓은 들판으로 나가고 싶다"고 적었다. - 조용호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