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빚갚기’ 악순환…“그래도 사채없인 장사 못해”

한겨레 | 입력 2012.06.03 20:20
[한겨레][뉴스쏙] 사채늪 허우적대는 자영업자들


지난 4월18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경찰은 불법 대부(사채)업자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벌였다. 단속이 한창이던 때, 1억원의 사채빚을 진 막창집 사장과 3000만원의 사채빚을 진 꽃집 사장이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당국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햇다.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은 "사채 없이는 장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상인들이 있는 한, 사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지난달 26일, 서울 강북구 ㄱ재래시장 일대에는 평소 나뒹굴던 일수업체의 명함들이 보이지 않았다. 명함을 무차별로 뿌리는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둑놈들, 요새 정부가 단속한다니 쏙 들어갔네." 어느 상인이 말했다.

당국의 사채업자 단속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 4월26일 ㄱ시장에서 꽃집을 운영하던 김아무개(55)씨가 세상을 떴다. 3000만원의 사채를 끌어썼다가 빚독촉에 시달린 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은 지난달 21일 경찰에 검거됐다. 사채업자들은 근처에 비밀 사무실을 차리고 지난 3년간 강북구·도봉구·노원구 일대 개인사업자나 영세상인을 상대로 돈을 빌려줬다. 이들은 최고 연 600%의 이자를 받았다. 피해자는 50여명에 이르렀다.

원리금 계속 눈덩이
빚독촉에 목숨끊는 상인들
600% 고리 챙긴 사채업자도


ㄱ시장에서 가전제품을 파는 한아무개(50)씨는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한씨도 살인적 사채 금리의 늪에 빠졌다가 10년 만에 겨우 탈출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가게 운영자금이 모자라 은행에 대출신청을 했지만,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마침 사채업자를 알게 돼 100만원을 빌렸다. 하루 1만2000원씩 100일간 갚는 조건이었다. 하루라도 밀리면 "돈을 빌려줄 테니 그걸로 갚으라"며 사채업자가 강제로 대출해줬다. 대출금이 늘어난 만큼 이자도 올려받았다. 연체 때마다 돈을 빌려 원금과 이자를 갚는 일이 반복됐다. 하루하루 번 돈으로 빚을 갚는 건 불가능했다. 10년이 지났을 때는 추가로 쓴 사채를 포함해 빚이 모두 1억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결국 3년 전 집을 팔아 갚았다. "그 뒤로는 '일수'라는 말만 들어도 잠이 안와요." 한씨가 말했다. 매일 갚아나가는 사채를 시장 상인들은 '일수'라 부른다.

쓰기 싫은 '일수'를 쓸 수밖에 없는 일이 시장 상인들에겐 생긴다. ㄱ시장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는 정아무개(50)씨는 "월세나 고깃값이 밀릴 땐 유혹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씨는 "사채업자를 단속한다 해도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게 문제"라며 "어려울 때 은행이 자금을 빌려 주고, 경기가 좋아지면 그 돈을 갚게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실은 반대다. 경기가 좋으면 은행은 마이너스 통장 대출한도를 높여준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지면 대출을 중지하고 상환을 독촉한다. 금융위원회 등에 따르면, 저신용등급(7~10등급)에 속하는 채무자 1인당 평균 신용대출이 올해 1월 기준 2649만원으로, 2009년 2657만원에 비해 0.3% 줄었다. 반면 대부업 대출 규모는 2009년 5조9200억원에서 지난해 12월 기준 8조7175억원으로, 거래자 수는 189만명에서 252만명으로 늘었다.

집팔아야 끝난 변제"
처음에 겨우 100만원이 시작
일수라는 말 들어도 잠안와"


아직 정확한 실태가 파악된 적은 없지만, 저신용등급에 처한 채무자 상당수는 중소규모 자영업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전국 자영업자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자의 84.3%가 빚을 지고 있었고, 평균 부채는 1억1364만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일반가계 평균 부채금액인 8289만원에 비해 3075만원 많다. 이들의 월 평균 이자비용은 94만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대부업을 통해 돈을 빌린 경우도 13%였다. 자영업자 10명 가운데 한명은 사채빚을 쓰고 있는 셈이다. 자영업자의 빚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 결과, '원금을 못갚고 이자만 내고 있거나, 돌려막기로 오히려 이자가 늘어났다'는 경우가 70.5%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자영업 규모가 작아질수록 사채에 의존하는 경향은 더 높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가 자금을 융통할 방법이 사채 외에는 마땅치 않다.

서울 동대문구 ㄴ재래시장에서도 지난 3월 한 음식점 주인이 사채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도 ㄴ시장 상인의 상당수가 여전히 사채를 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장 상인들에게 '일수'를 놓고 있는 김아무개(53)씨는 "내가 50여 가게에 일수를 놓고, 또다른 일수업자(사채업자)가 70여 가게에 일수를 놓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 800여 상인 가운데 15% 정도가 사채를 쓰고 있는 셈이다.

사채 두둔하는 상인들
"은행 돈은 빌리기도 힘든데
우리가 어디서 돈 꾸겠어요"


경기변동에 민감한 것은 사채업자인 김씨도 마찬가지다. 4년여 전 1억5000만원을 종잣돈 삼아 '일수'를 시작한 그는 한때는 100여 가게를 고객으로 삼았다. 그러나 2년 전부터 경기가 나빠져 폐업하는 가게가 속출했다. "그때 돈을 많이 떼였다"고 김씨는 말했다. 위험부담이 높아질수록 김씨가 상인들에게 받는 이자도 올라간다.

그래서 시장 상인들은 사채업자를 욕하면서도 두둔한다. "카드 대출은 한달 안에 갚아야 하지만, 일수는 서너달 동안 조금씩 갚을 수 있어 상인들이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ㄴ시장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박아무개(52)씨가 말했다. 불법 대부업자를 수사한 강북경찰서 김주경 지능팀장도 "'은행은 돈 안 빌려주니까 급할 땐 폭리를 내더라도 사채를 써야 한다'며 시장 상인들이 사채 피해에 대한 진술을 거부해 난감했다"고 말했다. 공연히 사채업자의 횡포를 신고했다가 급전을 구할 수 없는 일이 생길까봐 상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은행의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시장에서 자영업자와 사채업자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당국은 불법 대부업 단속 기간 동안 6400명을 검거하고 168명을 구속했지만 앞으로 사채가 사라질 것이라 믿는 시장 상인들은 없었다. 단속이 끝난 6월 첫 주말, 사채빚에 떠밀린 꽃집 사장이 목숨을 끊은 ㄱ시장에는 다시 일수업체 광고지가 나돌았다. "하루 이자 200원", "신용불량자 가능", "무담보 당일 즉시 대출"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난한 시장 상인들에게 그 조건에 돈 빌려주는 이는 사채업자뿐이다. 이경미 기자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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